노마드와 바리데기
노마드와 바리데기
  •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 승인 2021.06.13 19: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요즘 한껏 우울하다. 무기력에 빠져 한 번 누우면 시간개념 없이 종일 그런 채로 있다. 상황이 그렇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늘 그랬던 것도 아니다. 예전엔 우울하다 싶으면 뭐든 해내며 스스로를 다지고 펴서 멘탈을 잡곤 했는데 요즘엔 끝도 없이 꺼져가는 기분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문제는 늘 있었고 앞으로도 작든 크든 나를 흔드는 문제와 상황은 늘 있을 것인데 뭐가 이리도 나를 밑으로만 끌어내릴 고민 중에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다는 영화를 한 편 보았다. 코로나 시국에 극장에서. `노매드 랜드'였다. 소유와 성취에서 존재감을 확인받던 내 생애와 전혀 다른 결의 이야기였다. 특히 다큐멘터리 영화 같아 매우 신선했다.

`노매드 랜드' 주인공 펀은 남편은 죽고 아이도 없는데 다니던 회사가 금융위기로 흔적조차 없어졌다. 그러자 그녀는 타고 다니던 승합차를 개조해 살림집으로 꾸며 떠돌기 시작한다. 뭐든지 혼자 해결해야 하는 절박한 현실 앞에 당당해 보이지 않았지만 조용하고 간결하게 살아간다. 자신의 처지에 비관하지 않는다. 캠핑장이나 아마존에서 일을 하기도 하고 추운 겨울엔 남쪽으로 이주해 살기도 한다. 그녀가 떠돌며 체감했을 외로움과 고독, 남편을 잃은 상실감이 어땠을까 생각해보았다. 언니가 있었고 자신을 아껴줄 가족을 만들 수 있었지만 끝내 떠도는 노마드의 삶을 택한 그녀의 내공이 한없이 부럽고 아름다웠다.

문득, 설화 `바리데기'가 떠올랐다. 딸만 내리 여섯을 낳은 임금의 또 막내 공주로 태어난 바리데기. 탯줄이 끊어지자마자 버려진 아기를 먹이고 입히고 키운 것은 부모의 따뜻한 보호와 사랑이 아니다. 버전이 좀 다르긴 하지만 바리데기는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혹은 자연이 주는 최소한의 보살핌 아래 스스로 자란다. 심지어 자신을 버린 병든 아버지를 위해 생명 약수를 구하기 위한 모험을 떠난다. 아무도 돌보지 않은 아기는 그렇게 단단한 존재가 된 것이다. 처음 바리데기 설화를 읽었을 때는 인정받지 못한 존재가 인정받기 위한 애씀 정도로 이해했다. 그리고 꼭 그렇게 해야 하나 인간적인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바리데기는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무엇도 마다하지 않고 물 흐르듯이 살아냈다는 깨달음이 생겼다.

나는 어릴 적 특별히 불우하거나 집안에 문제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온실 속에 화초로 자랐고 생애 초기의 밝고 좋은 환경으로 어려움이 생겨도 제법 잘 처신하고 문제 해결력이 있다는 말을 들으며 살았다. 하지만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말처럼 피투된 인간으로 어딘가에 기투하고 싶어 안달났던 것 같다. 그래서 더욱 진지하고 의미 있는 것에 천착하며 살았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판단하거나 그것에 흘러가려고 하지 않았다. 욕망하고 채우고 성취하고 인정받고 싶어 지나친 에너지를 쏟았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인생이니까. 그렇다고 딱히 뭔가 이룬 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 펀은 편안한 잠자리와 누군가의 보호를 포기하고 그녀만의 `자유'와 함께 길 위에 있다. 버려졌지만 기적적으로 순하게 자란 바리데기는 자신의 운명을 흐르는 곳에 두고 할 일을 해냈다. 제도와 선입견에 물들지 않고 그녀 만의 길을 개척해 살아갔다. 지금, 두 여성은 내게 영혼에 잔뜩 들어간 힘을 빼고 애쓰고 힘쓰기 전에 자신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하라고 조언한다. 내가 나를 잘 데리고 살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시간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