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안에도 파랑은 있어
초록 안에도 파랑은 있어
  • 신은진 한국독서심리상담학회 회장
  • 승인 2021.06.10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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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그릇에 담긴 우리이야기
신은진 한국독서심리상담학회 회장
신은진 한국독서심리상담학회 회장

 

특별한 이력을 가진 그림책 작가가 있다. 레오 리오니(1910-1999)는 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을 했고 화가, 조각가, 사진작가로도 활약했다. 그는 어린 시절 고흐와 렘브란트의 그림을 똑같이 그리기를 즐겼다고 한다. 나에게도 비슷한 취미가 있다. 가끔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와 `해바라기'를 따라 그리곤 한다. 고흐의 시간을 공유하는 것 같아 마음이 평안해지며 작품에 스며 있는 작가를 만나는 기분이다. 상담 장면에서 우울감을 호소하는 청소년들과 명화 따라 그리기를 하는데 작가의 그림으로 들어가 힐링과 치유를 경험하곤 한다.

할아버지가 있었다. 기차여행 중 지루해하는 손자들을 위해 잡지를 오려 이야기를 만들었다. 아마도 그 여행은 너무 특별하고 귀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림책 작가 `레오 리오니'이며, 그때 만든 이야기 `파랑이와 노랑이'는 그림책 작가가 되는 계기가 된다. `파랑이와 노랑이'는 색종이를 찢어 붙이는 콜라주 기법으로 되어 있다. 색종이만으로 만들어내는 이야기에 깊은 울림이 있다. 파랑이는 엄마, 아빠와 살고 있으며 가장 좋아하는 친구는 노랑이다, 파랑이는 노랑이와 놀고 싶어 노랑이를 찾아 나선다. 파랑이는 노랑이를 만나 기쁘다. 파랑이와 노랑이는 초록이 되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파랑이의 부모는 “넌 우리 파랑이가 아냐. 넌 초록이잖아!”라고 한다. 노랑이 부모도 “넌 우리 노랑이가 아냐. 넌 초록이잖아!”라고 한다. 초록은 너무 슬퍼, 노랗고 파란 눈물을 흘리고 다시 파랑이와 노랑이가 된다.

좋아하는 친구와 신나게 놀다 보니 파랑이는 초록이 되었다. 그런데 부모가 너는 우리 아이가 아니라고 한다. 그 순간 파랑이는 마음이 어땠을까. 갑자기 부모와 분리되는 공포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부모와는 할 수 없었던 새로운 경험을 한 자신이 초록이 된 것이 매우 잘못된 것이어서 부모로부터 부정을 당하는 상황이 되었구나 싶었을 것이다. 그림책에서 파랑이 부모는 파랑이의 변화를 수용했지만, 만약 파랑이의 부모가 초록이 된 파랑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계속 거절했다면 어떠했을까. 부모는 아이에게 세상과도 같이 크고 중요한 존재인데, 파랑이가 아니라고, 노랑이가 아니라고 존재를 거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조차도 너무 무섭고 끔찍하다. 파랑이는 초록이 될 수도 있고 보라도 될 수 있으며 검정도 될 수 있다. 저마다 자기의 색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색을 만나 어떤 경험을 하는가에 따라 색은 변할 수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시기를 정체성을 탐색하는 시기라고 한다. 아동기와 청소년기에 학업을 통해 진로를 찾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것이다. 사실 나에 대한 본격적인 탐색은 자아가 형성되는 시점부터 시작하여 전 생애에 걸쳐 일어난다. 우리는 지금도 자기정체성을 탐색하며 이미 형성된 부분을 확인하기도 하고 새롭게 조율하기도 안다. 전 생애 중 아동기와 청소년기의 정체성이 가장 중요한 이유는 스스로 정체성 탐색을 하기보다는 타자에 의한 영향을 많이 받는 시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탐색에 대해 부정적 피드백을 받는다면 자기정체성 탐색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을 갖게 되고 결국 자아정체성 확립이 아닌 정체성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부모가 파랑이면 자녀도 파랑이어야 할까. 다른 색일 수도 있지 않을까. 자기의 색을 찾도록 지켜봐 주고 격려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는 생각을 한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본질의 정체감은 부모의 온전한 수용과 인정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획득한 정체성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변화한다고 하더라도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안심을 갖는 것도 바로 부모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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