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道의 삶
中道의 삶
  •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 승인 2021.06.10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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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論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낙이불음(而不淫) 애이불상(哀而不傷)! 즐거워하되 그 즐거움이 과해서 음란해지는 일이 없어야 하고, 슬퍼하되 그 슬픔이 지나쳐서 마음에 상처로 남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의미다. 공자님의 말씀으로, 어느 한 쪽의 극단으로 치우쳐 조화를 잃지 않는 중도(中道) 및 중용(中庸)의 삶을 강조한 가르침이다. 중도 및 중용은 단순히 이쪽과 저쪽의 중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중도 및 중용의 삶은 이쪽과 저쪽에 양다리를 걸친 채, 어중간한 입장을 띄는 회색의 애매모호(曖昧模糊)한 삶을 살라는 것도 아니다. 논리적으로만 봐도, 물리적인 중간을 중시하는 것은, 양쪽 말단을 버리고 중간이라는 두 극단으로 벌어진 채, 중도 및 중용의 삶을 외면하는 짓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진정한 중도(中道)란 무엇일까요? 우리의 인생길을, 이쪽과 저쪽의 천 길 낭떠러지를 연결한 외줄 위를 걷는 것에 비유할 때, 가장 안전하고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 바로 중도다.

어떠한 고정불변의 고착화된 중심점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상하좌우로 살아 움직이는 중심점을 밟으면서 걷는 길이 바로 중도의 삶이다. 사유재산제에 바탕을 두고 이윤 획득을 위해 상품의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는 경제체제로, 미국과 대한민국을 비롯한 수많은 나라를 지탱해주고 있는 자본주의(資本主義) 체제를 우파나 우익(右翼)이라고 한다면, 사유재산제(私有財産制)를 부정하고 생산 수단 및 그 생산물의 공동소유와 평등한 소비를 목적으로 생산 수단의 사회적 소유 및 관리를 주장하는 사회주의 체제를 좌파나 좌익(左翼)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지난 반세기 동안의 인류 역사가 극명하게 보여주었듯이, 우파 우익만 옳다고 고집하며 좌파 좌익을 부정하거나, 좌파 좌익만 옳다고 고집하며 우파 우익을 부정하는 짓은 무의미해졌다. 사회주의 체제를 대표하던 구소련과 중국이 자본주의의 시장경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고,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우리 대한민국도 초등학교 의무교육 및 의료보험 제도 등 사회주의 제도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1세기 인류의 의식 수준에서,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면서 어느 한 쪽에 치우친 채, 체제 우월의 망상 놀음을 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지구촌에서 가장 고립된 채, 전근대적인 군주제하에서 허덕이는 북한의 경우에도 어쩔 수 없이 `장마당'이란 형태의 시장경제를 받아들고 있다.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명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나눌 것 없이, 실질적으로 국민이 몸 건강하고 마음 편안하게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데 적합하고 필요한 제도라면, 즉시 받아들여 선용하면 그뿐이다. 천 길 낭떠러지를 연결한 외줄 위를 걷고 있는데, 왼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 거세면, 중심을 잡고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오른쪽 날개인 우익을 펄럭이면서 우파의 자본주의 제도가 우선돼야 한다.

반대로 오른쪽에서 불어오는 자본주의의 병폐가 지나치다면, 왼쪽 날개인 좌익을 펄럭이면서 좌파의 사회주의 제도에 비중을 두고 자본주의 병폐를 치유해야 한다. 좌익 좌파의 사회주의 제도에도, 우익 우파의 자본주의 제도에도 치우치거나 집착함 없이, `좌빨 우꼴 및 진보 보수'등의 체제나 진영 논리를 벗어던지고, 펄펄 살아 숨 쉬는 중도(中道) 및 중용(中庸)의 지혜로운 삶을 영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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