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산촌
비와 산촌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21.06.07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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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여름이 되면 부쩍 비 내리는 일이 잦아진다. 여름 비는 겨울 눈만큼은 아니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격리감을 느끼게 한다.

같은 곳인데도 비 오는 날 찾으면 한결 호젓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당(唐)의 시인 왕건(王建)은 여름 어느 날 비를 만났는데 그때 마침 이름 모를 산골 마을을 지나던 터였다.

비와 산촌(雨過山村)

雨裏鷄鳴一兩家(우리계명일양가) 빗속에서 한 두 집에 닭이 울고
竹溪村路板橋斜(죽계촌로판교사) 대나무 개울 마을 길에 널빤지 다리 걸쳐 있네
婦姑相喚浴蠶去(부고상환욕잠거)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서로 불러 다정히 누에 씻으러 나가고
閑着中庭梔子花(한착중정치자화) 마당 안에는 한가로이 치자꽃이 피었네


산골 마을 풍광이야 어디든 크게 다를 바 없겠지만 관건은 시인의 심리이다. 그 마을에 몇 집이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닭 우는소리는 한 두 집뿐이다. 비로 말미암아 마을의 소리가 푹 줄어든 것이다. 실제로는 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시인은 그렇게 느낀다.

그리고 대나무 사이를 흐르는 시내 위에 놓인 널빤지 다리가 비스듬히 기운 모습이 시인의 눈에 우선 들어온다. 이 역시 비의 영향이리라. 이런 가운데 어디선가 고부간에 서로를 찾는 소리가 들린다. 고치 알을 씻으러 가기 위해서이다. 이 소리가 유독 시인의 귀에 들어온 것 또한 비로 인한 것이다. 이렇게 두 여인이 빠져나간 집을 차지한 것은 마당 가운데 핀 치자 꽃이었다. 한가롭기 짝이 없는 풍광인데 이 또한 비의 선물이다.

산골 마을 정경은 보통 번잡한 도회지에 비해 호젓하고 한적해 보이기 마련이다. 여기에 비가 더해지면 그런 느낌이 배가되는데 이는 비가 만들어 주는 격리감 때문이다. 도시의 바쁜 일상에 파묻혀 사는 사람들은 비 오는 날 산골 마을을 찾아 가 보는 것이 좋다. 그곳의 한적함과 호젓함이 그동안 쌓인 삶의 찌꺼기들을 기적처럼 씻어 줄 것이다.

/서원대 중국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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