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리지아 꽃냄새
후리지아 꽃냄새
  • 장민정 시인
  • 승인 2021.06.03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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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장민정 시인
장민정 시인

 

반백의 노신사 둘이서 현관문을 밀고 들어선다.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왔다가 친구 어머니 병 문안차 방문했다는 J와 S다. 나를 보자 깜짝 놀란다. 내가 어머니 간병 차 친정집에 내려와 있는 줄 모르고 방문한 때문이다.

J는 제법 큰 회사 사장으로 아직도 현역이며, S는 경찰 간부로 명퇴했다나? 코흘리개 꺼병이 애들이 나름으로 잘 살아선지 그럴듯한 풍채가 한결 보기 좋다.

S의 근황은 가끔 풍문으로나마 전해 들은 것이 있지만 J는 이름도 얼굴도 생소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도시로 유학해서 여학교에 다녔던 유일한 애였다. 오빠하고는 두 살 터울, 학교는 1년 차를 두고 입학했지만, 오빠가 병치레로 재수하는 바람에 내 동창이 오빠 동창, 내 친구가 오빠 친구가 되었음은 물론, 그때 우리 집의 제법 큰 사랑방은 오빠 나이 이쪽저쪽의 사내애들이 다 모이던 곳이어서 어쩌면 나는 그들의 자랑스러운 여동생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대처에 유학하는 학생이라고 눈을 머리끝에 매달고 다니던 시절이라 오빠의 절친 몇을 제하고는 거의 무관심 일관의 무심함으로 지내기 마련이어서 아는 얼굴이 그리 많지 않았다.

J는 나보다 세 살 위인데 초등학교는 1년 후배이며. 초등학교 옆에 살았다니 한 동네 산 것도 맞는데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건이 맞지 않아 멀찍이서 지켜보며 애태웠다는 J. 나는 없는 기억을 짜내며 부엌으로 가서 커피를 내리고 있는데 거실에서 주고받는 그들의 대화가 또렷하게 들려온다.

“임마, 네 첫사랑이지?”

“뭐야, 얘가 할망구가 다 되었어, 나는 어머님이 서 계시는 줄 알고 인사할 뻔했단 말야!” 우리들의 여동생, 민정이는 어디 갔단 말이야!

울듯이 몹시 애석해하는 말투로 투덜대는 J에게 “한잔하더니, 헛소리까지 하구 야단이야, 임마, 다 들어, 조용히 하라구”



뭐야, 나는 씽크대 옆에서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서로 사랑한 것도, 친한 적도 없는 얼굴인데, 민망하고 어색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어디 갔냐고? 천둥벌거숭이 같은 55년 만의 해후. 70을 훌쩍 넘은 할미의 얼굴에서 열여섯 살 소녀를 떠올릴 수 없다고 투덜거리는 J. 물 한 바가지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난다.

눈 한 번 마주친 적 없는데 첫사랑이라니……. 그러니까 소위 첫사랑이나 짝사랑 같은 것은 다분히 자신만의 환상에 불과한 것 아닌가? J는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부서진 아이처럼 자신만의 환상이 산산조각이 난 것을 투정하고 있는 것이다.

창밖에 수선화가 무더기무더기 노랗게 피어있다. 엄마가 잘 가꾸어 놓은 화단, 이른 봄, 고개를 떨구고 있는 노란 수선화들이 불현듯 후리지아 꽃으로 치환되어 진한 향기를 풍긴다. 아홉 살 어린 나이의 단테가 빼아트리체를 처음 만나는 순간이 후리지아 꽃향기 만발한 저택에서였던가?

딱 한 번 스치듯 보고서 평생을 사랑한 단테의 지고지순한 짝사랑이 떠오른다. 우리 모두 첫사랑은 평생을 간직하고 싶은 아름다운 환상! 그러므로 첫사랑은 영원히 만나지 말아야 한다는 누군가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정말 오랜만에 젊음이며 사랑이며 청춘이며 꿈이며…. 까마득히 잊었던 젊음의 단어들을 소중하게 호명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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