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기
밤새기
  • 반영호 시인
  • 승인 2021.06.03 17: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時論
반영호 시인
반영호 시인

 

홀로 땅콩 밭을 지키며 밤샘하기란 여간 지루하고 긴 시간이 아닐 수 없다. 무료한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다가 밤낚시를 생각해 냈다, 일부로도 밤낚시를 간 적도 많은데 땅콩밭을 지키고 밤낚시도 즐긴다면 일석이조다. 밭 아래 끝쪽 산모롱이에 자가 연못이 있다. 크기가 30평쯤 되는데 수심도 꽤 되고 낚을 어종도 붕어, 잉어, 향어가 있다. 평소에는 오리와 기러기들의 놀이터가 오늘 밤새기의 유용한 장소가 될 줄은 몰랐다.

낚싯대를 차려놓은 옆에 가지런히 활도 함께 정돈해 두었다. 여차하면 즉각 대처할 수 있도록 화살을 장전시켜 놓았다. 밤샘하는 데는 누렁이 `나리'와 큰 집에 가 있던 누렁이의 딸 `까미'도 함께하기로 했다. 이 정도면 외롭지 않은 밤이 될 것 같다.

드디어 사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캐미를 꺾어 찌에 불을 밝히고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야외용 접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자 어수선했던 마음도 안온하니 평화롭다. 불던 바람도 밤이 되면서 잠잠해지고 능끝들 건너 읍내에 하나 둘 불이 켜지더니 천천히 불바다로 변하고 있다. 밤나무골에서 건너다보는 읍내의 야경이 일품이다. 모내기가 한창인 요즘 물을 가득 담아 놓은 논에서 목청껏 합창을 하는 개구리들이 외롭고 적막한 밤을 밝히고 있다.

저기압인지 찌는 미동도 없이 붙박이로 서 있는데 어둠에 겁먹고 내 옆에 찰싹 붙어 있던 누렁이의 새끼 `까미가' 갑자기 코를 벌름거리며 킁킁거리자 누렁이도 귀를 쫑긋 세우고 긴장한다. 무엇인가를 감지했나 보다. 우리는 냄새를 잘 맡는 사람들을 보고 `개 코'라고 한다. 개의 후각은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해 있다. 후각은 보통 1000배에서 많게는 1억 배가량 더 뛰어나며 냄새를 맡는 세포도 사람보다 40배가량 많다. 또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20에서 2만 헤르츠 사이의 소리를 느낄 수 있지만, 개들은 4만 헤르츠에 달하는 고주파의 소리까지 감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개들은 사람이 들을 수 없는 소리까지도 반응하며 그뿐만 아니라 개들에겐 음의 리듬을 감지하고 쓸모없는 소리는 걸러내는 기능도 갖춰져 있다. 인간에 40배 이상의 놀라운 청각을 지녔기 때문에 사냥할 때 살금살금 도망가는 야생동물을 찾아내는가 하면 밤중에도 주인의 발자국과 먼 곳에서 들리는 주인의 차량 소리를 알아보는 것은 예민한 청각에 의해서다.

먼저 움직인 것은 어미인 `나리'다. 산 밑 닭장 쪽인 듯싶다. `까미'도 어미를 뒤따라갔다. 나는 반사적으로 활을 집어들었다. 연못에서 닭장까지는 50m 거리다. 늘 연습하던 거리로 딱 좋게 영점이 맞춰져 있는 상태다. 그런데 아뿔싸 어두워 물체를 확인할 수가 없는 게 아닌가. 활은 밤엔 무용지물이다. 할 수 없이 플래시만 들고 뒤쫓아 갔다. 땅콩이 심어진 밭은 검은 비닐이라서 어는 곳이 고랑이고 두둑인지 분간이 어렵다.

으르렁대는 소리와 처절한 비명이 들렸다. 후다닥 거리는 것으로 보아 쫓고 쫓기며 난투극이 벌어진 게 분명하다. 닭장 아래에 도착했을 때는 으르렁 소리도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플래시에 비치는 것은 푸른빛이 반짝이는 `나리'와 `까미'의 눈빛뿐이다. 가만 비춰보니 임도 밑으로 놓은 배수로 수멍이다. 어찌 된 일일까. 이리저리 플래시를 비춰봤지만 개 두 마리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나리가 수멍 반대편으로 이동하더니 수멍 안으로 기어들어 갔고 까미가 지키고 있던 쪽으로 무엇인가 후다닥 튀어나왔다. 다시 추격전이 벌어졌다. 추격전은 길지 않았다. 나리가 무엇인가 제 덩치만 한 검은 물체의 덜미를 물고 있었고 `까미'는 뒷다리 쪽을 공격하고 있었다. 불빛을 비춰봤다. 너구리다.

땅콩밭을 초토시켰던 범인, 너구리. 너구리는 결국 죗값을 치르는 최후의 날이 되었다. 심판자는 누렁이 `나리'와 그의 딸 `까미'가 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