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치의 세월
무자치의 세월
  • 정명숙 수필가
  • 승인 2021.06.02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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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수필가
정명숙 수필가

 

한번 물면 그냥 끝내지 않는다. 세상살이 괴롭다는 아우성이 커질수록 겉모습은 화려해지고 교활해진다. 연약하고 부러진 데 많은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재주가 뛰어나 치밀하게 그 틈새를 파고든다. 욕망에 사로잡힐수록 결과가 참담하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서식환경은 열악해 졌어도 독은 향기롭다.

마당 끝에서 눈길을 낮춘다. 잦은 비에 물소리가 거칠다. 징검다리 돌을 두 번만 디디면 건널 수 있는 작은 계곡을 지나면 산자락 귀퉁이에 묵정밭이 있다. 단오가 지나면 쓴맛이 강해지는 쑥을 뜯으러 가는 길이다.

가까이서 들리는 뻐꾸기 소리가 처량하다. 인기척에 놀란 어린 고라니가 산등성을 향해 뛰어오른다. 나뭇가지들이 덩달아 후다닥거린다. 물가에는 잡풀이 우거져 있다. 디딤돌에 한 발을 올려놓는데 누런색의 뱀 한 마리가 나보다 먼저 물을 건너 축축한 숲으로 도망간다. 독사도 아니고 화사도 아닌 흔하디 흔한 물뱀인데도 두렵다. 쑥을 포기하고 빠르게 발길을 돌린다.

모내기를 할 무렵이면 아버지는 논물을 대고 소를 앞세워 써레질했다. 들밥을 이고 가는 엄마를 따라갈 때는 두려움이 없으나, 혼자 아버지가 계신 논으로 가자면 들길에서 만나는 뱀이 무서워 몸이 오그라들었다. 철둑 밑에 무더기로 우글거리는 물뱀은 공포였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계신 논둑에 서면 논물을 가르는 뱀이 있었다. 독은 없어도 건드리면 물으니 조심하라 이르고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써레질을 하셨으나 나는 뱀에게서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뱀의 꼬임에 빠져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 먹자고 유혹한 이브의 원죄인가. 춤판을 드나들며 남자를 유혹하는 여자를 뱀의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lMF 위기 때부터다. 젊은 여자에겐 꽃뱀이라 하고 별 볼일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늙은 여자에게는 물뱀이라 한단다. 여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이젠 남자에게 해를 입히는 모든 여자를 꽃뱀이라 칭하고 있어 빠져드는 남자의 심리가 궁금했다. 꽃뱀의 작업과정을 얘기하던 지인이 내 얼굴을 보며 그대로 따라하면 큰일 난다고 주의를 준다. 꽃뱀 흉내도 내보지 못하고 젊은 날을 보낸 나는 정색을 하며 이유를 물었다. 치매 걸린 줄 알고 잡아다 입원시킬 거란다. 완전히 별 볼일 없는 물뱀취급이다.

물뱀도 생존을 위해서는 꽃뱀 못지않다. 먹이가 걸리면 절대 놓지 않는다.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상대가 먼저 건드리면 죽기 살기로 대들어 문다. 독이 없어도 누군가에게는 두려운 존재다.

남매끼리만 식사하고 여행을 떠날 때가 있다. 혈육이 뭉치면 그리 좋을 수가 없다. 시기나 질투도 없고 욕심도 끼어들지 않는다.

그날 저녁도 그랬다. 맛난 음식을 먹으며 농담 끝에 막냇동생에게, 요즘도 골프장에서 꽃뱀사건이 생기느냐 물었다. 사업상 골프모임이 잦은 걸 보며 노파심도 작용했으리라. 동생은 아무리 예쁘고 매력적인 꽃뱀을 봐도 이젠 물뱀으로 보이는 나이가 되었다며 큰소리로 웃는다. 상처받아 아프고 억울해도 독 한번 시원하게 품어내지 못하고 세월을 보낸 초라한 여자가 속없이 눈물이 나도록 따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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