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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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 승인 2021.05.30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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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어릴 적부터 상상하기를 좋아했다. 우리가 사는 곳 외에 다른 시공간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저 벽 뒤에, 저 문 뒤에 다른 세상으로 가는 통로가 있는데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며 아무도 없는 집안을 돌아다니며 벽이나 문을 괜히 두드려 보기도 했다. 머리가 굵어지고 다른 흥밋거리가 생기고부터는 잊고 지냈다. 그 시절 내가 얼마나 유치하고 어린애 같았는지 스스로 비웃으면서 말이다. 어른이 되어 다시 이런 생각에 휘말리게 되었다. 맞다. 보이지 않는 세상에 휘말렸다는 표현이 정확할 수 있다. 다시 상상의 끈이 되어 준 것은 그림책이었다. 그림책은 온통 판타지 그 자체다. 그림 몇 장과 적은 글씨만으로도 내 영혼을 쥐락펴락하는 그림책이 신비로웠다. 특히 가끔 글씨 없는 그림책을 만나기라도 하면 나는 바로 글쓰기 작가가 되는 듯한 착각으로 이야기를 꾸며댄다. 에런 베커가 그린 <끝없는 여행>이 특히 그렇다. 작가는 세계 여러 나라를 배낭 여행했다. 위대한 미술품이나 건축물이 있는 곳이 아닌 아프리카 오지나 북유럽 남태평양 등 일반적인 여행코스와는 다르다고 하니 더욱 흥미롭다.

글씨 없는 그림책의 주인공은 바쁜 아버지와 놀고 싶은 아이다. 책을 다 보고 난 뒤에는 이들이 내면의 자아와 현실의 자아, 상상력 자체와 상상력을 빼앗긴 어른으로 이분화되어 보였다. 표면적인 아버지와 아이의 관계를 빗대어 자신의 순수하던 시절과 일상에 갇힌 현재의 모습을 재조명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 영화를 처음 봤을 때 환상적인 느낌이 그림책에도 녹아 있다. 빨간색 연을 흘리고 사라진 아이를 찾아 빨간 공의 안내로 상상의 세계에 발을 들인 아버지의 모험이 시작된다. 상상의 세계에서 아이의 외면을 받기도 하고 아이와 함께 괴물을 물리치기도 하고 누군가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나기도 한다. 이런 모험을 통해 외면하던 관계에서 협력과 회복의 관계가 된다. 마법의 펜으로 생각하는 것을 그리기만 하면 그대로 만들어지는 세상, 어떤 어려움이 와도 결국엔 해결하는 해피엔딩 세계, 생각만 해도 그들과 함께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린다.

어른이 되면 상상력은 어릴 적 아무것도 모르던 시간의 부산물로 취급되어 기억 속에 잊혀진다. 옷장 속에 숨겨진 나니아 세계는 믿는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일일 것이다. 비현실적인 상상이 어쩌면 현실을 인도하는 중요한 나침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닐는지. 주위를 환기하고 각성하여 새롭게 도전하는 용기를 주는 도구가 상상력이다. 더불어 문제와 거리두기 하며 본질을 관조하는 관점이 생길 수 있다.

갑갑한 아포리아(aporia)시대에 간절하게 찾는 것이 판타지였으면 좋겠다. 이런 상상력의 세계도 현실을 방증하거나 토대로 삼고 있다. 우리의 생존 본능이 상상의 신비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다. 세상의 문제 해결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진검승부처럼 정면돌파도 있고, 회피도 있고, 진실과 성실일 수도, 기다림도 있을 수 있다. 어느 것도 옳은 방법이나 최적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나에게 맞는 방법이 있을 뿐이다. 살아가면서 그것을 찾으면 된다. 이것이 `상상의 힘'이다.

홍명희의 저서 <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에서 “몽상 속에서의 의식은 우리의 존재를 지켜주며, 우리가 길을 잃지 않도록 해준다. 그것은 이미지를 창조하고 우리가 그것을 충만하게 체험할 수 있도록 가치를 부여한다.”고 설명한 바 있다. 자유로운 상상 속에서 닫힌 문을 열고 엄두 내지 못했던 것에 가치를 부여하며 마음의 치유를 시작해보자. 우리는 그래도 된다. 이미 충분히 고단한 시간을 견디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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