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말
바람의 말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1.05.26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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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오월, 한 자락 바람이 분다. 봄을 저만치 밀어내고 있다. 호수의 물결이 가늘게 떨고 나뭇잎도 의의히 흔들린다. 내게 와 닿는 결이 부드럽다. 이런 바람이 부는 날은 마음까지도 간지러워 누가 유혹을 해오면 금방 넘어갈 것 같다. 봄의 꽃춤을 추던 우아한 춤사위가 드물게 광란의 춤으로 바뀔 때가 있다. 한없이 순해 보이는 바람이지만 더러는 포악한 모습으로 변한다.

센바람이 무섭게 나무를 쓰러뜨리고 폭우를 몰고 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 또 꽃을 피우게 하고 얼음을 녹인다. 엊그제 채널을 돌리다 본 빙하가 쏟아져 내리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이 광경을 보러 온 관광객들의 환호가 화면 밖의 나와 합쳐졌다. 정작 감탄해야 할 일이 아닌 걱정스러운 일이지만 장엄한 자연 앞에 사람들은 시비(是非)를 잊는 듯했다.

빙하는 눈이 겹겹이 쌓여 다져져서 생긴 두꺼운 얼음층이다. 스웨이츠 빙하는 남극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녹는 것으로 알려졌다. 빙하 아래 구멍이 생겨 그 사이로 바닷물이 들어가면서 얼음 온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구멍은 물이 들어갈 틈을 만들어 준 셈이다. 주변 온도가 높아지면 얼음이 녹는 원리다.

얼음이 신비롭다. 상식으로는 차가운 물이 더 빨리 어는 게 맞다. 뜨거운 물은 식어 얼기까지 시간을 계산하면 훨씬 늦을 거라는 생각이다. 따뜻한 물이 더 빨리 어는 이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음펨바 효과라는 이론에서 왜 손가(孫家)네가 떠올려졌을까.

시형제는 삼형제로 성격이 다 비슷하다. 급하고 불 같아서 감정이 쉽게 달구어진다. 그래서인지 스파크가 잘 일고 금방 식는다.

큰형과 작은 오해가 쌓여 생긴 두꺼운 오해층은 빙하가 된 지 서너 해가 되었다. 농막에서 밭을 사이에 경계를 두고 지내야 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나마저도 자연스레 그런 사이가 되었다. 냉랭한 기류는 넘나들지 못하게 높은 벽을 세웠다.

처음에는 마음이 불편하여 괴롭더니 시간은 차차 무심함으로 변했다. 서로 모르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갔다. 각자 밭에서 할 일을 하면 되고, 담 너머에 관심을 끊으니 오히려 편해졌다. 그래도 어찌 마음 깊은 곳의 소요까지 잠잠할 수가 있었겠는가.

어떤 의도였을까. 어느 날, 아주버니는 하필이면 경계에 개를 갖다 놓았다. 개는 짖기도 하고 악취도 심했다. 그이를 건드려 보자는 심산이었다면 아주 성공적이었다. 키우던 개도 내 잔소리에 없앤 그이가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옆에서 내가 다독여도 누그러지지가 않는 모양이었다. 참다못한 그이가 드디어 폭발했다.

바람을 타고 넘어오는 개의 역겨운 냄새와 크게 짖는 소리에 불뚝성이 터졌다. 거기를 향해 잔돌을 던졌다. 큰소리가 넘어왔다. 다시 화가 잔뜩 섞인 소리가 넘어갔다. 넓고 넓은 땅을 두고 집 가까이도 아닌 맨 끝에다가 개를 키우느냐는 공격이다. 다시 역습이다. 내가 내 땅을 갖고 내 마음대로 한다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다.

날카로운 날이 서로 할퀴어 상처를 낸다. 차츰 지치고 무뎌지면서 큰소리도 한풀 꺾였다. 격한 말도 온화하게 돌아선다. 동생인 그이가 먼저 나서서 사과를 던지니 형도 사과로 되돌려 준다. 화해다. 마음을 연다는게 어디 쉬운 일이랴. 닫혔던 문이 단번에 빗장을 푸는 법은 없다. 틈이 서서히 생겨야 한다. 그래야 얼음이 녹는 법이다.

얼음장 같던 둘의 마음에 샅을 만든 건 시간이지 않을까. 거부할 수도, 멀리 한다고 멀어질 수도 없는 관계의 끈이 흔들릴 때마다 바람은 가만히 기다렸으리라. 드디어 고자누룩한 둘의 간격을 주저 없이 몰아쳤으리라. 그날, 바람이 쾌쾌한 냄새를 싣지 않고 찔레꽃 향기를 얹고 왔다면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바람은 때로는 흔들리고, 부딪히고, 깨지는 강풍으로 거세게 말을 한다. 폭풍은 나무를 더 깊게 뿌리내리게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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