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일기 1
텃밭일기 1
  • 이창옥 수필가
  • 승인 2021.05.26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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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창옥 수필가
이창옥 수필가

 

괴산 장날이다. 평상시였다면 두리번거리며 눈요기도 하고 이것저것 가격도 물어가며 장바닥을 활보하고 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곧장 장터 끝 천변에 모종을 팔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천변에는 수십 가지의 모종들이 가득 늘어져 있다.

요즘에는 시골 농부들도 아예 모종을 사다 심는다고 하더니 고르는 솜씨도 예사가 아닌 듯 품종을 묻고 수확량을 따져가며 모종들을 살핀다. 농막에서 남편에게 각종 채소이름을 읊어 대면 의기양양하던 자신감은 사라지고 눈길은 흥정하는 농부의 뒷모습을 따라다니다 이내 풀이 죽는다.

모종 달라는 소리는 입도 떼지 못하고 우물쭈물 눈치만 보고 있는데 “어떤 모종 드릴까유?”하며 묻는 주인아저씨의 정겨운 사투리가 왜 그리 반갑던지, 기회는 이때다 싶어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쏜살같이 말했다. “그러다 숨 넘어 가겄슈.” 하더니 포토에 심겨진 모종들을 용케도 주문숫자대로 싹둑싹둑 잘라 봉지에 담아준다.

봉지를 챙겨들고 일어서니 길 건너 나무 노점에서 꽃들이 바람에 살랑거리며 눈짓을 한다. 참새가 방앗간을 어찌 그냥 지나치랴.

이름도 모르는 모종 앞에서 주눅 들었던 마음이 활짝 펴지며 시간이 멈춘다. 장터 사람들의 왁자한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손에 들고 있던 모종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꽃 삼매경이다. 향기가 일품인 위실나무 앞에서는 기어이 넋을 놓아버렸다. 나는 역시 농부는 못되려나 보다.

서둘러 농막으로 돌아와 텃밭에 토마토와 가지를 심는 간격을 두고 남편과 옥신각신했다. 둘 다 시골 태생이지만 농사일에는 서툴러 모종을 심을 때마다 벌어지는 일이다. “여보 이러다 우리 또 등신소리 듣는 거 아녀” 했더니 한두 번 듣는 것도 아닌데 뭔 걱정이냐며 웃는다. 땅을 마련하고 텃밭을 가꾸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에구 등신”이었는데 이번에도 누군가는 또 그런 소리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오늘부터 얼치기 농부 흉내를 내며 텃밭일기를 써보려고 한다. 곡식들도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 만큼 잘 자란다고 하니 시간 나는 대로 텃밭에 와서 풀을 뽑아주고 벌레도 잡아주며 살펴줄 생각이다. 지난번에 심어놓은 상추가 제법 자라 바람에 나풀거리며 눈짓을 한다. 오늘 점심 밥상에는 상추쌈을 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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