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길에 만난 달팽이
산책길에 만난 달팽이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21.05.25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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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첫날부터 미룰 수 없어 우산을 들고 나선다. 요즘은 저녁으로 영 운동할 짬이 나지 않아 차라리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 걷기로 한 것이다. 응천 둑길을 따라 생극 초입까지 차가 다니지 않는 좋은 산책로가 있다. 봄엔 벚꽃 길, 여름에는 싱그러운 녹음이 우거지고, 가을이면 곱게 단풍이 물든다.

이미 걷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내가 아직 자고 있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활기차게 하루를 시작했던 거구나. 오늘은 나도 25시간의 하루를 살게 될 것 같아서 왠지 뿌듯하다. 몇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내 옆을 지나쳐 갔지만 나는 천천히 미지의 시간을 즐기며 걸었다. 걷다 보니 길은 어느덧 반환 지점을 돌아 천변으로 이어진다.

바닥에 달팽이 한 마리가 기어가는 것이 보였다. 아니, 한 마리가 아니다. 비가 와서 그런지 여기저기 꽤 여러 마리가 제 깜냥만큼의 집을 등에 지고 꽃밭을 향해 가고 있다. 저 속도로 이 길을 가로지르려면 꽤 오래 걸릴 텐데, 까딱하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밟혀 죽는 일도 다반사일 것이다. 이미 일을 당한 달팽이들도 눈에 띈다. 귀가 있어 발소리를 듣고 미리 피할 수도 없고 위험을 감지해 집 속으로 숨어도 사람의 무게를 버텨낼 만큼 집이 튼튼 치도 못하다. 또 집이 크고 단단하다면 매일 짊어지고 다닐 일이만만치 않을 테니 안타까울 수밖에.

언젠가 책에서 곤봉딱정벌레가 달팽이 잡아먹는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가장 단단한 부분으로 거죽을 덮어 약한 살들을 지키려 한, 달팽이가 끝까지 믿었던 보호막은 너무 약했다. 천적의 단단하고 예리한 턱은 단번에 껍데기를 부쉈고 보호막 속 연약한 살들은 그 한 번의 공격만으로도 치명타를 입었다. 때론 거대한 대상 앞에서 무엇도 속수무책일 때가 있다.

그러면 껍데기조차 없는, 단단한 뼈가 약한 살 속에 숨어 있는 인간은 어떨까? 뼈대가 안에 있고 연한 살을 거죽에 두는 게 과연 달팽이보다 안전할까? 난 그것을 오히려 인간의 지능적인 선택의 결과라고 본다. 인간에게는 생각할 수 있는 두뇌가 있다. 약한 살과 피부는 계속되는 외부자극으로 인해 조금씩 단련될 테고, 뼈대는 점점 근육과 함께 안쪽에서 힘을 키워 몸 전체를 지탱할 만큼 단단해질 것이다. 그걸 예측해 이쪽으로 진화한 건 아닐까? 인간이 달팽이처럼 집을 짊어지고 다니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어쨌든 모든 생명은 자연이라는 커다란 그물망 위에서 각각의 선택에 따라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다.

생각을 좇다 말고 갑자기 아들이 떠올랐다. 실습 나가는 곤충연구소에서 곧 있을 반딧불이 축제를 위해 유충을 기르고 있는데, 그 유충의 먹이가 바로 달팽이란다. 그래서 바쁜 틈틈이 달팽이를 찾아 풀 섶을 헤맨다고 했었다. 아들과 통화한 뒤 나는 달팽이 십여 마리를 잡았다. 통이 없어서 얼른 우산을 접고 그 안에 넣어 가지고 왔다. 집까지 오는 동안 부슬비에 옷이 젖었지만 그게 뭐 대수겠는가. 이 세상에서 엄마라는 이름은 무소불위다. 하지만 그것이 자식의 보호막이 아니라 스스로 단단해질 기회를 막는 차단막은 아닌지 늘 돌아봐야 할 것이다.

그나저나 내 무례한 개입으로 졸지에 운명이 바뀌게 된 달팽이들에겐 정말 미안하다. 달팽이를 넓은 통 안으로 옮겨주고 싱싱한 상추를 듬뿍 얹어주며 마음으로 용서를 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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