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조가 된 남자
백조가 된 남자
  • 임현택 괴산문인협회 지부장
  • 승인 2021.05.2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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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임현택 괴산문인협회 지부장
임현택 괴산문인협회 지부장

 

이슬이 반짝인다. 꽃잎 끝에도, 나무 이파리에도 아주 잠깐이라도 맺힌 이슬이 아름답다. 발끈한 햇살에 다 녹아 없어질지라도 잠시나마 우리 곁에서 행복한 그를 한참을 바라본다. 아직도 서늘한 바람이 만만치가 않은 나날이다. 제아무리 서늘한 바람이 기승을 부려도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제법 쨍쨍하게 내리쬐는 오후다. 또다시 창밖을 기웃거렸다. 창 너머로 내다보이는 정원, 한참 보고 있자니 전원에서 서울촌사람으로 통하는 지인의 얼굴이 얼비춘다.

봄은 입맛에서부터 온다고 했는데 지인의 손끝에서 오는 것 같다. 그는 코를 찌르는 듯한 매캐하고 답답한 도심을 벗어나 전원에서 인생 2막의 장을 열어가는 분이다. 허나 삶이라는 것이 수학공식처럼 딱딱 맞아떨어지는 정답이 있겠는가. 현실을 초월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낭만과 꿈은 꿈일 뿐, 녹록지 않은 현실은 잡초와의 전쟁이다. 한 송이 어여쁜 꽃을 보려고 얼마나 많은 손이 가야 하는지 상상을 훌쩍 뛰어넘어 예상 그 이상이었다. 전원생활의 상징과 로망인 파란 잔디를 키우려면 얼마큼의 노고가 있어야 하는지 만만치 않은 하루하루다.

어느덧 귀촌생활 십 년이 훌쩍 지났다. 서울촌사람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사는 그도 이젠 시골사람이 다 된 듯 보였다. 백조가 호수에서 우아하고 품위 있는 자태를 유지하려면 수면 아래 두 발은 끊임없이 발놀림을 해야만 본연의 자태를 뽐낼 수 있다. 또한, 쉼 없는 자맥질로 엉클어진 깃털을 손질해가야만 기품 있고 아름다운 날갯짓을 한다.

백조처럼 아름다운 전원생활은 거저가 아니었다. 자고 일어나면 웃자란 잡초들은 지인을 어느 순간 백조의 남자로 만들었다. 햇볕이 따갑기 전에 황새가 먹이를 잡기 위해 긴 목을 구부려 먹이를 낚는 것처럼 울안을 한 바퀴 돌아치는 습관이 생겼다. 그럴 때면 손아귀엔 어느새 자잘한 잡초가 한 움큼이다. 그렇게 뽑고 뒤돌아서면 또 뾰족하게 올라오는 잡초와 한판승부를 겨룬다.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고 잡초군락엔 덕석으로 푹 덮어 잡초를 제거한다. 깊이 박힌 뿌리를 뽑지 못할 때면 물을 팔팔 끓여 잡초에 부어 뿌리까지 고사시켰다. 참으로 유별스럽다. 그리 온몸을 혹사하면서 친환경을 위해 애쓰는 모습에 주변에선 별스럽다며 혀를 차기도 했다.

손톱 끝마다 풀물이 까무잡잡하게 배어 있고, 손바닥 실금은 커피색으로 얼룩졌다. 두툼해진 손마디가 부끄러워 주먹을 쥐는 버릇이 생겼지만, 낯빛은 맑고 밝다. 하늘 한번 올려다보기 어려운 도심에서는 전자기기에서 시와 때를 읽었건만 전원생활은 확연하게 달랐다. 절기(節氣)가 어찌 그리도 잘 맞는지 세월의 흔적을 억지로 찾아내지 않아도 계절의 감각을 절로 느낄 수 있다. 때문에 노년의 길목, 삶의 깊은맛을 알 수 있는 행복에 취해 입꼬리가 올라간다.

잡초들이 무성해질 때면 어느 시구처럼 `사람들아 잡초라고 함부로 짓밟지 마라 /고향을 지키는 민초들이다'라며 너스레를 떠는 여유도 생겼다. 이렇듯 빠르게 변화하는 세월 앞에 유연할 수 있는 여유는 서울촌사람의 또 다른 삶의 로드맵이 되어 동행한다.

바람과 햇빛 그리고 낭만 사이를 오가며 사시는 서울촌사람은 어느새 손끝이 매워졌다. 꽃이 있으면 나비가 찾아오고, 나비가 있으면 꽃이 번성하는 것처럼 자연이 주는 소중한 선물 앞에 백조의 남자는 발놀림을 멈추지 않는다. 마음이 가는 대로 사물이 보이는 것처럼 마음에 꽃이 있으니 꽃이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 오늘 난 거칠어진 내 마음을 가만가만 들여다보곤 고개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봄 햇살이 머무는 자리, 가벼워진 옷차림처럼 내 마음도 몸도 가벼웠으면 좋겠다. 먼발치 봄바람 속 희미하게 백조의 남자가 보이는 듯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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