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과 동정, 두 젊은 죽음의 차이
공감과 동정, 두 젊은 죽음의 차이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1.05.11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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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인간에게, 아니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게 무겁지 않은 죽음은 없다.

죽음에 대해 살아남은 이들의 감정은 대체로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아득한 인연의 끊어짐에 대한 처절한 슬픔으로 먼저 다가온다. 그리고 부족했던 나눔과 소통, 아쉽기 그지없는 생애에 대한 탄식과 서러움으로 세상의 모든 죽음은 어느 것 하나 가벼울 수가 없다.

푸른 5월에 세상에 회자하는 두 젊은 죽음 사이에서 나는 비참하다.

한 젊은이는 드넓은 한강에서 주검으로 떠올랐다. 친구를 만나러 나간 뒤 소식이 끊긴 젊은 자식은 살아남은 부모의 애를 태웠고, 끝내 단장(斷腸)의 한을 아비 어미의 가슴에 새겨놓고 말았다. 그는 `서울'의 한 사립대 의대생이었으며, 어떻게든 아들을 다시 만나고 싶은 부모의 간절함은 홀연히 사람들을 끌어모으며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

`평택'의 부둣가는 여전히 위험했고, 비정규직 아버지의 삶은 고단하고 서러웠으므로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스물세 살 어린 아들마저 위태로운 부둣가 위협적인 컨테이너 작업장 한복판에 세워야 했을 아비의 가슴은 도저히 온전할 수 없다.

아들은 학비를 스스로의 힘으로 벌어야 했고, 그런 자식을 위태로운 컨테이너 부두에 세워야 했던 아비의 가난은, 게다가 비정규직의 서러움은 살아있을 때도 고통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아들이, 제 손으로 낳아 기른 자식이 아비의 눈앞에서 목숨을 잃었다. 스물세 살 아들은 마음 편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지 못했고, 얇은 허리를 움츠리고 고개를 잔뜩 숙여 지상만을 바라보고 있다가 300kg이 넘은 쇳덩이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한강변에서 실종되어 한강의 깊은 물에서 떠오른 젊은 죽음. 아비의 정신은 온전할 수 없고, 짧은 생은 고스란히 서러움으로 남았으며, 세상은 그 비통함 사이에 흐르는 수상스러움에 지극하게 반응하고 있다.

그 해 5월 18일 이후 빛고을 광주에서의 피울음과 풀리지 못하는 가슴 속 한(恨)은 뚜렷하지만 갈수록 희미해지는 거리가 있으니, 우리는 아직 일하다가 목숨을 잃어야 하는 위태로운 세상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5월은 우리에게 여전히 핏빛이다.

그런 5월에 마주쳐야 하는 두 젊은 죽음 사이에서 나는 공감(empathy)과 동정(sympathy)의 아득한 거리에 몸살을 앓는다.

가난했거나, 가난 때문에 불행했으며, 그리하여 억울하고 아쉬운 일이 더 많았던 죽음은 결단코 동정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주검으로 한강에 떠오른 자식에 대해 절망하는 아비에 대해 동정(혹은 연민)할 수는 있으되 그 석연치 않은 죽음에 대해 공감할 수는 없다. 만에 하나 누구라도 한강변에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가 뜻하지 않게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위험이 있다 해도, 공감으로 극복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평택항의 비극과 같은 여전한 위태로움은 허전한 중대재해처벌법과 더불어, `일'을 해야만 먹고살 수 있는 우리 모두에게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위험이므로 더 많은 공감으로 세상을 움직여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다른 사람의 고통 혹은 곤경이거나, 부족함에서 비롯되는 비교적 애틋한 감정인 동정(sympathy)은 `나'는 절대로 당사자가 아닌 안도감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공감(empathy)은 다른 사람이 처한 위험과 위태로움, 그리고 불안과 불행의 처지를 함께 생각하며, 그들의 고통뿐만 아니라 극복해내야 할 과제 또한 `함께'실천하는 든든한 연대의 힘이 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죽음은 가볍지 않고, 언젠가는 누구도 피할 수 없다. 타자에 대한 동정도 애틋하겠으나, `함께'공감하며 `우리'로 거듭나는 세상. 간절하고 원통한 수많은 5월의 죽음들로도 여태 만들지 못하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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