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라기 쑥버무리
싸라기 쑥버무리
  • 이창옥 수필가
  • 승인 2021.05.10 20: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이창옥 수필가
이창옥 수필가

 

바구니를 챙겨들고 쑥이 다보록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왼손으로 자라난 쑥을 잡고 칼로 도려냈다. 한 움큼 도려낸 쑥을 코끝에 대어보니 쌉싸래한 쑥 향기가 싱그럽게 온몸으로 퍼지며 쑥의 온기를 전달한다. 더도 말고 딱 한 끼 끓여 먹을 양만 담긴 바구니를 들고 일어섰다. 바구니에 담긴 쑥 위로 하얀 꽃잎이 살포시 내려앉는다. 언덕 위 나무에서 꽃잎이 눈처럼 흩날리는 중이다. 정말 눈부신 봄 은혜로운 봄이다.

추위가 물러가고 양지쪽에 쑥이 움트기 시작하면 냉장고 문을 열고 날 콩가루가 떨어지진 않았는지 확인부터 한다. 쑥국을 끓일 때는 꼭 날콩가루에 버무려 넣어야 제 맛이다. 새싹이 돋아나고 땅심을 받고 자라나기 시작한 쑥이 내 가운뎃손가락 크기만큼 자라면 바구니를 챙겨들고 쑥을 뜯으러 나선다. 너무 크게 자란 쑥은 쌉싸래하고 향이 강해 쑥국용으로는 적당하지 않고 너무 여린 쑥은 밍밍해 맛이 덜하다. 쑥을 씻어 놓고 장독대 항아리에서 된장을 떠 와 멸치와 다시마를 넣어 미리 우려 놓은 물에 심심하게 풀었다. 날콩가루에 버물 거린 쑥을 넣고 한소끔 끓이니 고소함이 더해진 쑥 향기가 모락모락 입맛을 자극한다.

해마다 이맘때면 의식처럼 쑥국을 서너 차례 밥상에 올린다. 그 의식의 흐름 끝자락에는 대바구니에 가득 담겨진 싸라기 쑥버무리가 김을 모락모락 올리며 반긴다. 엄마는 가난했던 살림살이에 귀한 쌀로 쑥버무리를 해먹는 일은 감히 꿈조차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방아를 찧고 난 후 쌀겨를 체로 쳐서 나오는 싸라기를 포대에 모아 두었다. 쑥이 흔한 봄이 되면 모아 두었던 부스러기 쌀로 쑥버무리를 쪄서 대바구니에 담아 부엌 광에 놓아두셨다. 그때부터 나는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광을 들락거렸다. 엄마가 시루에 쪄낸 쑥버무리는 늘 찰기 없이 푸슬푸슬 했지만 달달하고 씹을수록 입안에 쑥 향이 가득했다.

봄날 지천으로 자라는 쑥은 엄마에게도 보릿고개를 살아내야 하는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금보다 귀한 구황 식물이었을 것이다. 가난함을 벗어나 삼시 세 끼 쌀밥을 맘껏 해먹을 수 있는 오늘날까지도 엄마의 쑥버무리는 봄이면 꼭 해야 되는 의식처럼 이어지고 있다.

엊그제도 쑥이 다보록하게 자란 것을 살피더니 “쑥버무리를 해먹으면 맛나겠네” 하셨다. 그 소리를 듣고 언니가 쑥버무리를 만들었다. 차지고 뽀얀 쑥버무리가 부드럽고 맛깔스럽게 입맛을 당긴다. 언니는 엄마의 손맛을 대물림 한 듯 솜씨가 좋다. 그럼에도 엄마의 싸라기 쑥버무리를 다시는 맛볼 수 없는 허전함 때문인지 울적하다. 나에게 쑥 버무리는 봄날 유년을 떠올리는 따뜻하고 그리운 음식이지만 엄마에게는 궁핍한 살림살이에 자식들을 든든하고 배부르게 먹이고 싶은 고맙지만 아픈 쑥버무리는 아니었을까.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입맛을 자극하고 그리워지는 엄마의 음식 한두 가지쯤은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엄마 손맛이 담긴 음식을 떠올리면 힘든 세상을 지탱하는 힘이 되어 주기도 하고 때론 메말라 가는 감정에 온기를 돌게 하지 않던가. 궁핍했던 시절 엄마의 정성이 담긴 푸슬푸슬 했던 쑥버무리를 내 재주로는 영원히 흉내도 못 낼 일이다.

그럼에도 해마다 봄이 오면 나는 움트는 쑥을 살피고 냉장고 열어 날콩가루가 떨어지진 않았는지 확인을 할 테다. 쑥버무리 대신 쑥국을 밥상에 올리며 그 옛날 가난했던 시절 엄마가 해주시던 싸라기 쑥버무리가 있던 그곳으로 추억여행을 떠나리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