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길
밤길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1.05.0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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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진하지도 않으면서 은은하게 퍼지는 이팝나무 꽃 향에 어두운 밤길이 안온하다. 남편은 저녁을 먹고 느지막한 시간에 걷기운동을 하고 있다. 오늘은 오랜만에 나도 남편을 따라나섰다.

어느새 천변은 형형색색 물들이던 영산홍과 벚꽃도 지고 초록의 식물들만이 키를 키우고 있는 중이다. 아직은 풀벌레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일까 개천을 흐르는 물소리에 온 정신이 쏠리게 되었다. 그동안 수없이 오가던 개천이었는데 물소리가 이리도 다르게 들리다니 놀랍기만 하다. 물소리는 구간 마다 그 소리가 다르게 들려왔다.

조용하면서도 부드럽게 흐르는 물소리의 구간은 개천 바닥도 평평하고 돌들도 자잘했다. 그런데 조금 큰 돌들로 턱을 만들어 놓은 곳에서는 물소리가 힘차게 들렸다. 돌 틈을 빠져나오려 소리를 지르는 듯하다. 그렇게 돌 틈을 빠져나온 물은 여울을 만들고 있었다. 남편은 내가 딴생각에 정신이 팔린 줄도 모르고 열심히 걷기 운동에 열중이다. 남편을 따라가랴 개천 속을 들여다보랴 뛰다 걷다를 하다 보니 어느새 복개천 지하 터널 구간이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시끄럽기 시작했다. 바닥은 평평한 콘크리트임에도 물소리는 터널 밖의 몇십 배는 시끄러웠다. 그리 높지도 않은 둔덕이 있는 곳에 다다르니 깊은 산 속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폭포의 물소리처럼 우렁찼다. 그렇다고 시원하게 들리는 소리는 아니다. 오히려 탁한 소리가 섞인 소리라고 해야 옳다. 그 소리가 마치 비명처럼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진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터널 끝에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신기한 일이다. 지하 터널 안,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는 보안등도 있고, CCTV도 있다. 하지만 개천을 사이에 둔 맞은편은 컴컴해서 한때는 우범지대로 여기던 곳이었다. 그곳의 벽면에는 누군가 빨간색으로 알 수 없는 그림들을 그려 놓았다. 어쩌면 그 그림으로 인해 어두운 건너편에 대한 공포가 더 커졌을지도 모르겠다. 가끔 따라나가는 밤 운동에서 나는 그 지하터널을 걸을 때면 남편의 옆에서 바짝 걷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건너편의 어둠을 생각지도 않았다. 우렁찬 물소리가 어둠의 공포까지 몰아낸 셈이었다.

터널 밖은 다른 세상인 듯 평화롭기만 하다.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따라 걷다 보니 길가에 조그맣고 노란 애기똥풀이 보였다. 물론 밤이라 샛노란 애기똥풀의 색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앙증맞은 모습으로 머리를 살상 살랑 흔들고 있다. 개천을 비추는 주홍빛의 가로등 조명이 물 위에서 은은하게 일렁인다. 개천의 물들이 주홍빛 실루엣을 걸치고 왈츠를 추는 듯 조용하면서도 우아하게 리듬을 타고 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길, 인적이 드문 길을 남편과 천천히 숨을 고르며 걷는다. 남편은 조용히 걸으라며 나에게 신호를 보낸다. 영문도 모른 채 발소리를 죽이며 걷는데 그때 길가 집에 매여 있던 개가 요란스레 짖기 시작했다. 점점 멀어지는 개 짖는 소리를 뒤로하며 우리는 어느새 이팝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길을 걷는 중이다.

이팝나무 아래에 섰다. 나는 담쑥이 이팝나무 꽃을 쥐어 보았다. 향긋한 냄새가 묻은 내 손을 남편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꽃에 관심이 없던 남편도 이팝나무 꽃 향은 싫지 않은 모양이다. 무덤덤하게 `좋네'하고 돌아서는 남편의 어깨 위로 나는 얼른 손을 얹었다. 밤길이 이리도 따뜻할 수가 없다. 밤길, 혼자 걸으면 무서운 길이다. 하지만 무서운 그 밤길도 든든하게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선물 같은 일들이 기다리는 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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