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것대산 봉수대의 슬픈 사연
청주 것대산 봉수대의 슬픈 사연
  •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 승인 2021.05.03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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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봉수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 국가의 긴급 통신수단이다. 대부분의 봉수대는 높은 산 위에 위치하는데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내는 통신시설이다.

청주에도 이런 봉수대가 있다. 찾아가는 길은 상당산성 제1터널 입구의 작은 공원에서 상봉재 길을 따라 청주시내를 바라보며 산을 오르면 어느덧 상봉재 고갯마루에 다다른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가면 상당산성이 나오고, 오른쪽 산등성이를 따라 올라가면 청주시민들이 즐겨 찾는 것대산 봉수대를 만나게 된다. 요즘 이곳은 인기있는 레저활동인 패러글라이딩 활공 장소로도 활용되고 있다.

것대산 봉수대는 전국의 5개 봉수 노선 가운데 경남 남해의 금산 봉수에서 출발해 서울 목멱산(남산)까지 가는 두 번째 노선이며, 고려시대부터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쪽으로는 문의 소이산 봉수에서 연락을 받아 북쪽으로 진천 소을산 봉수에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거차대봉수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이후의 지리서에는 거질대산봉수라고 적혀 있다. 이곳에는 별장 1인, 감관 5인, 봉군 25명, 봉군보 75명이 소속되어 교대로 봉역을 담당하였다. 평상시에는 1번, 적군이 나타나면 2번, 적군이 국경에 접근하면 3번, 국경을 침범하면 4번, 전투가 벌어지면 5번의 불꽃이나 연기를 올렸다고 한다.

이곳 것대산 정상에 봉수대가 만들어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봉수제도가 마련된 고려시대부터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조선 고종 31년(1895) 봉수제도가 없어질 때까지 묵묵히 그 기능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까지 것대산 봉수대는 동서로 긴 타원모양으로, 둘레에 보호벽을 둘렀던 흔적이 남아 있으나, 무덤 1기가 봉수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성의 주변을 살펴 사태를 알리는 통신시설인 봉돈의 위치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었는데 2009년 봉수대를 복원하여 시민이 많이 찾는 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곳 것대산 봉수대에는 가슴 아픈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 영조 때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인좌의 난이 일어날 때의 일이다. 이 무렵 것대산 봉수대에는 선이라는 예쁜 외동딸을 둔 봉수지기 목씨 노인이 있었다. 예쁘고 지혜롭게 자란 선이는 봉수대 아랫마을 청년인 백룡 총각과 정혼까지 하였다. 그러나 홀로 남을 아버지를 생각하며 혼인 날짜를 미루고 지냈다. 백룡 총각은 하루라도 빨리 혼인하고 싶은 마음에 매일 같이 봉화대에 올라와서 장인인 목씨 노인의 일을 거들어주고 있던 터였다.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반군은 봉화가 피어올라 서울로 보고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가장 먼저 병사들을 것대산 봉수대로 보내 봉수지기 목 노인을 죽였다. 이날은 청주에서 5일장이 서는 날이었는데 선이는 청주 장에 나간 백룡 총각을 기다리기 위해 고개마루에 나가 있다가 병사들이 아버지를 해치는 것을 목격했다. 놀란 선이는 곧바로 봉수대로 달려가 봉홧불을 지펴 연기를 피워 올렸다. 그러자 반군의 병사들은 봉수대로 올라가 선이 마저 죽이고 봉홧불을 꺼버렸다. 이때 장에서 돌아오다 봉수대에 연기가 오르는 것을 보고 급하게 달려온 백룡 총각은 선이의 죽음을 목격하고 병사들에게 달려가 격투 끝에 반군들을 격퇴하고 봉홧불을 지펴 연기를 피워 올려 청주에 반란군이 일어난 것을 알릴 수 있었다. 결국 서울로 반란이 일어난 사실이 보고되었고, 이인좌의 난이 진압될 수 있었다.

이번 주말에는 것대산 봉수대를 올라야겠다. 죽음으로 고향과 나라의 어려움을 알린 선이 처녀와 백룡 총각의 슬픈 전설을 생각하면서 마음속의 봉홧불이라도 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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