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보살사중수비 복원이 필요하다
청주 보살사중수비 복원이 필요하다
  • 연지민 부국장
  • 승인 2021.05.03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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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연지민 부국장
연지민 부국장

 

청주의 대표적인 사찰을 꼽으라면 그중 하나가 보살사다. 청주 사람들에게 소풍 장소로도 많이 기억되는 이 사찰은 오랜 역사성을 자랑하는 곳이다. 청주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절답게 보살사는 창건 이후 숱한 중창의 역사가 구전기록으로 전해진다.

주요 포털에 기록된 `보살사'를 보면 567년(위덕왕 14)에 법주사를 창건한 의신이 창건하였고, 778년(혜공왕 14)에 진표의 제자 융종이 중창한 이후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 중창·중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구전에 의존하다 보니 그 기록을 증명할 방법은 여의치 않았다. 사찰은 중수비나 사적비가 세워져 있어 역사성을 획득하는 데 보살사는 그 실마리를 찾기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그랬던 보살사의 중수비가 발견됐다. 창건과 중창 내력을 기록한 중수비(重修碑)가 사라진 지 33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청주시 사진DB에서 찾아낸 중수비 사진기록을 바탕으로 시작된 보도와 현장조사를 통해 실물이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1988년 굴착기로 옮기다 깨진 후 사람들의 기억에서 까마득히 잊힐 즈음, 중수비는 깨진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난 셈이다.

보살사 경내에서 발견된 중수비는 비닐천막에 덮인 채 오랜 세월을 보낸듯했다.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 숲 속 언덕에 구멍이 숭숭 뚫린 비닐천막을 덮고 있는 모양새가 그랬다. 중수비가 파괴될 당시만 해도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고, 사찰의 스님들도 이동하고 바뀌면서 중수비의 가치나 내력도 기억 속에서 멀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에는 국가가 개발과 경제성장에 주력할 때이고,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역사는 뒷전으로 밀리던 시절이니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30년이 넘게 방치된 채 있었다는 사실이 우리의 문화재 보호와 유지에 대한 허점을 여실히 드러내 씁쓸하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등한시할 때 일본은 한국의 문화를 철저히 조사했다. 조선의 문화말살 목적으로 진행된 조사인지는 모르지만, 보살사 중수비에 대한 가치를 일본이 먼저 알아봤다. 1919년 조선총독부가 단행본으로 발행한 조선금석총람에는 보살사 내력이 담긴 중수비의 존재가 정확하게 남아있다. “연대 1683년(숙종9년). 충청북도 청주에 있는 보살사를 중수하고 그 내력을 기록한 비문이다. 보살사는 고려 때 창건돼 공민왕이 토지 등을 내려 운영하였던 사찰로 조선에 들어서 세조가 왕명을 내려 보호하였던 내력을 기록하였다”고 적힌 내용을 통해 100년 전 일본의 기록정신도 엿볼 수 있다.

그렇게 일본의 기록이나 탁본에 의존하던 보살사 중수비가 이번에 실물이 발견됨에 따라 우리 스스로 역사의 실마리를 꿰는 작업이 가능해졌다. 복원의 여부와 방식이 과제로 남았지만, 지역사를 풍부하게 연구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수비의 가치는 새롭다. 무엇보다 청주를 대표하는 사찰의 창건과 중창 내력을 알 수 있고,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면서 맺은 왕과의 관계와 절의 내력은 청주사 연구에 중요한 단초가 된다. 또한 보살사는 능성구씨, 청주한씨 등 청주에서 가장 오래된 족보를 간행한 곳이고, 문화재로 지정된 을축갑회도의 무대였다는 점에서 사찰의 역할도 재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청주시가 기록문화도시를 표방하고 있는 만큼 문화재 복원 역시 기록정신을 복원하는 일이기도 하다. 다시 역사의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보살사 중수비에 대한 고민은 깊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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