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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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명숙 청주문인협회 회장
  • 승인 2021.04.22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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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청주문인협회 회장
정명숙 청주문인협회 회장

 

옆집 사는 어린 종분이가 신행을 왔다. 딸 많은 집에 첫 사위가 생겼다고 잔치 전부터 모인 이모들과 자매들의 웃음소리가 밤낮으로 담을 넘어왔다. 사흘을 묵고 시댁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새신랑의 구두가 사라졌다고 야단이 났다. 식구들이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았다.

결혼식 때 구두를 사면 평생을 신던 시절이어서 종분이 엄마는 이웃집 대문 안을 의심의 눈초리로 기웃거리기도 했다.

딸만 있는 집이니 여분의 남자 신발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맨발로 나설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니 어쩔 수 없이 하룻밤을 더 묵게 되었다.

예전의 시골집은 어느 집이나 소를 길렀다. 사랑채 부엌에는 소죽솥이 걸려 가을부터 봄까지는 여물을 끓여 먹였다.

새신랑이 하룻밤 더 머물게 되던 날도 종분이 할아버지는 평소와 다름 없이 땅거미가 내려앉은 무렵, 마른 짚단으로 소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구수한 소죽 냄새에 섞인 가죽 타는 냄새에 방안에 있던 이모들이 놀라 밖으로 뛰쳐나왔다.

신랑을 보내기가 아쉬웠던 이모가 구두를 아궁이 속에 감춰두었는데 할아버지께서 발견하지 못하고 불을 지폈던 것이다. 종분이 엄마는 친정동생들을 호되게 나무라면서도 걱정이 태산이었다. 없는 살림이라 오동나무 장은 엄두도 못 내고 이불 두 채만 장만해서 보내는 것도 어려움이 컸는데, 비싼 구두를 사줘야 할 일이 난감했다. 무엇보다 구두를 사주면 도망간다는 속설은 더욱 걸렸다. 허나 이튿날 아침, 어쩔 수 없이 십오 리를 걸어나가 새 구두를 사서 신겨 보낼 수밖에 없었다. 찜찜해 하던 종분이 엄마의 불안감은 적중했다. 종분이가 결혼한 지 몇 해 지나지 않아 노름에 빠졌던 남편이 딴살림을 차려 집을 나갔다고 했다. 남자에게 구두를 사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간직한 채 종분이 신랑의 구두 사건은 차츰 먼 기억의 공간 속으로 유폐되었다. 헌데, 요즘 남자구두 한 켤레가 불안감을 저녁연기처럼 피워 올린다.

오래전부터 나는 비싸도 좋은 구두를 신어야 좋은 일도 많이 생길 것이라 여겼다. 그러한 영향은 내 피붙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친정아버지 살아생전 몇 켤레의 멋진 구두를 사드렸었고 남동생 셋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제일 먼저 고급구두를 사줬다. 자식 낳아 키우고 공부시키느라 늘 장화를 신고 일만 하셨던 아버지께는 잠시라도 꽃길을 걸었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담았고 운동화만 신다가 검정색 정장 구두를 사주면 뒤 굽이 달 때까지 반짝반짝 빛이 나게 아껴 신던 동생들에게는 평탄한 앞길이 펼쳐졌으면 하는 소망을 담았다. 가족에게 하는 구두선물에는 아무런 불안감이 생기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성에게 하는 선물은 다른가 보다.

정장 구두가 마땅치 않다는 말에 선뜩 구두를 선물했다. 밤색의 세련되고 신고 벗기가 편한 모양이라 보기에도 멋졌다. 대부분 가장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에 힘겨워 하는 것이 안쓰러워 이젠 가볍고 편안한 길만 갔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며칠 지나자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함께한 세월만 믿고 경솔한 짓을 한 건 아닐까, 한나절만 소식이 없어도 안절부절못한다. 유폐되었던 종분네 구두사건이 왜 이리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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