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우물
생각의 우물
  • 박명자 수필가
  • 승인 2021.04.21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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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자 수필가
박명자 수필가

 

눈길 닫는 곳마다 꽃이 곱습니다. 아침에 그리 쏟아지던 비가 그치고 해가 났습니다. 주변은 금세 따뜻한 온기로 채워졌네요. 남편은 천변 길을 걷자고 제안합니다. 나는 못 이긴 채 따라나섰습니다. 하늘이 유난히 맑습니다. 작은 입씨름으로 사이가 벌어져 종일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지내기를 여러 날이 됐습니다. 작은 오해가 틈을 만들고 감정이 그 자리를 메웠습니다. 나는 눈에 힘을 주며 잘못도 없이 먼저 손 내밀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힐 때입니다. 처음 둑길을 걸을 땐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었습니다. 하얀 꽃눈이 눈썹 위로 수없이 날립니다. 길가 제비꽃의 미소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납니다. 흰 솜털을 보송하게 단 쑥도 바람에 일렁입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그 사람 곁에 나란히 걷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미워하고 싸울 시간이 없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데 현실은 나약한 나를 자꾸 시험에 들게 합니다. 우리는 병원 전문의로부터 형 집행 선고를 받을 때처럼 눈앞이 캄캄한 날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무심했던 몸 관리에 절망의 날이 이어졌고, 분노가 가슴 안을 때때로 휘저었습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살길을 찾아 나선 때가 5년 전입니다. 그날부터 하루는 더디기만 했고 새벽녘이면 가슴을 베이듯 서늘함이 밀려와 눈이 떠졌습니다. 안간힘을 쓰는 그에게 측은지심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혼자 우는 시간이 있었지만, 서로에게 눈물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요즘 독서 모임에서 어린왕자를 읽고 있습니다. 왕자가 살던 작은 별에 까다로운 장미꽃 한 송이와 불을 뿜는 화산 두 개, 사화산 한 개가 있습니다. 왕자는 매일 물을 주며 꽃을 돌보았고, 화산도 정성스레 청소했습니다. 청소가 제대로 되어 있으면 부드럽고 규칙적으로 연기를 뿜지만, 그렇지 않으면 마그마가 분출하여 많은 괴로움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여러 별을 돌아 지구에 온 왕자는 정원에 핀 수천 송이 장미꽃을 보고 울었습니다. 우주에 단 하나뿐이라 생각했던 별에 두고 온 꽃이 평범한 것임에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지요. 그때 여우가 나타났습니다. 당신이 나를 길들인다면 내 생활은 기쁨으로 가득 차고 당신의 발자국 소리는 마치 음악처럼 나를 동굴에서 나오게 할 거예요. 마음으로 보아야 잘 볼 수 있어요. 당신의 장미가 소중한 것은 꽃을 위해 매일 물을 주고 유리 덮개를 씌워주며 길들인 별에 두고 온 당신의 장미꽃뿐이라고, 서로를 길들인 관계에는 언제 까지나 책임이 따른다는 진리를 잊어선 안 된다고 합니다. 우리 내외는 오랫동안 서로를 길들이며 살아왔습니다. 가끔은 까다롭고 가시를 세운 장미꽃이지만 시간을 함께하며 서로를 길들인 관계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그 말에 생각이 깊어집니다. 그리고 보니 화산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에 제 안의 감정도 열정과 기쁨으로 다스릴 수 없었나 봅니다.

급행열차의 기관사도 사람들도 왜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타고 있어요. 무엇을 찾아가는지 원하는 것이 뭔지 모르는 것뿐만 아니라 관심도 두지 않고. 계속 바쁘게 이동할 뿐이라고 왕자는 안타까움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보니 제가 살아온 날들이었습니다. 이제 하루하루를 느리게 소중한 날로 채워가야겠습니다. 어린왕자를 통해 생각의 우물을 넓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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