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 써!
쓰다 써!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1.04.13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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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시골에서 뜯은 것이 안덕벌에서 뜯은 것보다 많이 쓰네!” “부추도 아린 맛이 더 강하고.”

“여기보다 더 추워서 그렇겠지?”

꽃이 피고 질 때쯤이면, 집안은 온통 초록의 더미다. 참나물, 취나물, 오가피 순, 화살나무 순 등 온갖 순은 다 따서 무더기 산을 이룬다. 무더기 산은 나눠 줄 사람들 몫으로 작게 더미를 나눈다. 겨울을 나고 처음 벤 것은 보약이라고 다른 사람은 안 준다는 부추, 파 값이 비싸 덩달아 귀한 쪽파, 한겨울 혹한을 8월의 녹음보다 더 깊은 색과 두께로 승화시킨 시금치까지 단으로 나뉘어 배치된다. 그리고 남은 것은 아침 밥상에 조금씩 조물조물 무쳐 나오고 국으로 등장한다. 나물은 젓가락으로 집어 오물오물 봄을 확인하고 시금치 국은 입안에 머무를 새도 없이 후루룩 목젖을 넘는다. 아욱국보다 더 달고 맛나다. 짧디 짧은 봄, 이때가 아니면 즐길 수 없는 사치다. 매년 몸이 기억하는 봄인데 해가 지날수록 맛의 깊이가 달라진다.

봄은 아주 짧다. 긴 겨울을 지낸 끝의 봄이라 더욱 그렇다. 그 짧은 봄의 꽃은, 앞다퉈 피워 아침에 꽃잎을 열고 저녁에 닫는 여유로운 녀석, 낮밤을 가리지 않고 활짝 열어젖히는 녀석들까지 순간의 시간을 즐긴다. 그리고 날것을 불러들이고, 봄비의 시샘을 마다하지 않는다.

살구꽃, 매화꽃, 앵두꽃이 피고 이내 졌다. 다음 순서가 무엇인지 서둘러 꽃잎을 떨군다. 그리고 순을 내밀어 톡톡 터트린다. 이맘때의 순은 꽃보다 예쁘고 가녀리다. 검고 튀튀한 줄기, 보잘 것 없는 찐득한 거죽을 밀어내고 보드라운 색을 올린다. 짧은 봄의 향연을 시샘하는 봄비를 탓할 시간이 없다. 너무나 분주해 보드라운 순은 곧바로 녹음으로 치닫는다.

분주한 잎은 햇살을 받아 날것들에 의해 수정된 것들을 키운다. 꽃이 지고 바로 바통을 이어받자마자 쏜살같이 내닫는 이유다. 한 줄기의 가느다란 빛이라도 긴 장마의 순간순간에 여우볕이라도 받아들이려는 치열한 삶의 현장인 것이다. 잎이 키우는 것은 열매다. 그리고 궁극의 목적은 열매 안의 씨앗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잔뿌리 수많은 잔가지와 연대를 통해 물을 올리고 햇빛을 축적해 수정된 열매를 키우고 다음 세대의 씨앗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짧게 피는 꽃이던 길게 피는 꽃이던 열매를 단다. 과육이 많은 녀석은 더욱 일찍이 꽃을 떨구고, 열매가 씨 자체인 듯한 녀석들은 좀 더 길게 꽃을 단다. 혹독한 겨울이 오기까지 부여된 시간은 열매를 키우는 시간이다. 열매 씨앗은 나뭇가지 끝에 땅속에 있다. 녀석들에게 열매는 수단이다. 자신의 영역을 넓히고 더욱 강하고 지속적이게 하는 씨앗을 담은 그릇인 것이다. 씨앗은 자연의 모든 것에 있다. 도장지를 자르려다 실수로 우레탄 폼이 나뭇가지에 묻은 것 같은 사마귀 알을 발견한다. 도장지라도 자를 수 없다. 바로 옆에는 죽어서도 치열했던 사냥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알을 깐 녀석의 사체가 있기 때문이다. 녀석은 알을 낳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밟히고 짓이겨져도 죽지 않는 뿌리를 가진 민들레가 바람과의 인연으로 전 세계를 누비고 있듯, 자연의 것들은 존재하는 것들끼리의 관계를 잘 알기에 순응한다. 언젠간 죽을 걸 알기에 약한 걸 알기에 부지런하게 활동하고 이겨내고 치열한 현장에서의 자신을 다져나가는 것이다.

더러는 더 달게 승화시킨 녀석도 있지만, 험난한 길에서 얻어진 것은 맵고 쓰다. 맵고 쓴 것은 보약이다. 그렇게 되기엔 부지런함과 꿋꿋함이 있어야 하고 관계 속의 한 부분임을 인지해야 한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치열한 삶 속에서 약자인 자신을 고뇌하며 정진하고 꿋꿋하게 버텨내는 관계적 존재, 험난한 여정이 길어질수록 이겨내고 버텨야 할 일은 많아질수록 외롭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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