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의 정
안방의 정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21.04.12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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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봄은 꽃의 계절이다. 무채색의 얼굴로 긴 겨울을 버텨 낸 초목들은 온화한 봄바람에 안도하고는 조금의 꾸밈도 없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이다. 꽃은 피는가 싶으면 곧 지고 만다. 이런 의미에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은 덧없는 꽃의 일생에 대해 정곡을 찌른 말이다. 피는 꽃과 지는 꽃 사이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어떠할까?

조선(朝鮮)의 시인 이옥봉(李玉峯)에게 낙화(落花)는 단순히 꽃이 지는 게 아니었다.



안방의 정(閨情)

有約來何晩(유약래하만) 만날 기약 있었건만 오시는 게 왜 이리 늦는지
庭梅欲謝時(정매욕사시) 마당 매화 지려 할 때
忽聞枝上鵲(홀문지상작) 문득 가지 위 까치울음 듣고는
虛畵鏡中眉(허화경중미) 부질없이 거울 보며 눈썹 그리네

시인이 봄을 기다린 것은 겨울의 삭막함을 싫어한 탓도 있었겠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 그리운 사람과의 재회 약속이 그것이다. 봄이 되어 매화 피면 온다던 사람이었다. 그 약속 하나 믿고 모진 겨울을 견디며 매화 피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던 터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봄이 왔고, 마당 매화에 꽃이 활짝 피었다.

이제 시인의 얼굴이 활짝 필 일만 남은 듯하였다. 그러나 매화 핀 지도 한참 지났건만, 약속했던 사람은 오질 않는다. 왜 이리 늦으실까?

시인의 초조함은 시든 매화 꽃잎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마당의 매화꽃이 곧 질 것 같다. 약속 시간이 다 끝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은 약속을 어길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매화 지기 전에는 올 것이고, 그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기다리는 사람이 곧 올 거라는 시인의 기대는 문득 들린 까치 울음으로 말미암아 더욱 확고해진다. 까치가 울면 손님이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시인은 거울 앞에 앉아서 눈썹 화장을 한다. 그 사람이 금방이라도 앞에 나타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허사였다. 매화 다 지도록 끝내 그 사람은 오지 않았고 눈썹 화장은 괜한 일이 되고 말았다.

피기만 하는 꽃은 없다. 피는 꽃이 있으면 반드시 지는 꽃도 있게 마련이다. 봄을 알리는 매화도 피는가 싶으면 곧 지고 만다. 곧 지는 꽃이기에 더 아름다운지도 모른다. 마당에 매화 피면 다시 오마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매화 지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매화도 지기로 한 약속을 지켜야 하니 말이다.

/서원대 중국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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