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처럼
봄비처럼
  • 박명자 수필가
  • 승인 2021.04.06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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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자 수필가
박명자 수필가

 

가뭄 끝에 단비가 왔다. 부추 잘라가라는 엄마의 전화도 왔다. 엄마는 부추가 한 뼘쯤 자라면 전화하신다. 부추 무침을 좋아하는 사위 생각이 나서라고 하지만, 보고 싶으니 어서 오라는 재촉이다. 나는 서둘러 출발했다.

친정집 장독대 옆으로 부추가 실하다. 봄볕을 향해 땅을 박차고 솟아오른 힘이 느껴진다. 도톰하고 짤막한 부추 수확은 언제나 내 차지다. 부추 수확량이 엄마의 사랑만큼이나 많았다. 부추김치, 오이소박이를 맛깔 나게 담았다. 일부는 조금씩 종이에 돌돌 말아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끼니때마다 새콤달콤하게 무쳐 식탁에 올릴 참이다. 엄마 집과 우리 집 냉장고를 부추 향으로 채웠다.

구순을 바라보는 엄마는 몇 년간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하고 계신다. 매일 집으로 찾아오는 요양보호사가 가족처럼 의지가 된다고 하신다. 코로나로 인해 마을회관이 폐쇄된 후 집에서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 외로움이 크실 것이다. 이런저런 일로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내 마음도 편치 않다. 다행히 엄마의 건강과 정신이 그만한 것에 감사한다. 예전 같으면 내가 모셔야 할 텐데 사회복지제도의 큰 도움을 받고 있다.

봄은 누구에게나 도전할 용기를 준다. 사회복지에 관심이 있던 나는 우연한 기회에 사회복지학과의 설명회를 듣고 새내기 학생이 되었다. 입학식도 취소된 수업 시간,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학우들과 처음 만났다. 40명 학생의 연령대는 75세부터 30대까지 다양했다. 나이 많기로는 그중 나도 다섯 번째 안에 들지 싶다. 바이러스 장기화로 인터넷 강의를 병행하며 토요일만 출석 수업을 한다. 한 달이 지나도록 식당에서 함께 밥 먹을 친구를 찾지 못했다.

미술 심리치료 시간은 긴장감을 내려놓는 시간이다. 각자 멀찌감치 앉아 교수님의 설명에 따라 열 살 어린이가 되어 난화(畵) 그림에 이미지를 입혔다. 한 사람씩 자신의 그림에 대한 설명이 시작됐다. 짧은 시간임에도 각자의 지나온 시간이 드러났다. 그중에서도 자유의 품을 찾아 사선을 넘어왔다는 한 학우의 눈물에 조용했던 교실이 술렁였다. 목숨을 건 어둠의 터널을 지나온 그녀에 대해 궁금증이 일었다.

그녀는 그 먼 길을 혼자 왔을까. 혼자 왔으면 북에 두고 온 가족과 생이별을 했을 텐데 그동안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의지할 사람은 있는지. 삶이 힘들 때 가장 그리운 사람은 엄마이지 싶다. 내가 그렇게 살아봐서 잘 안다. 살면서 엄마가 가장 그리웠던 때는 결혼을 앞두고 상의할 사람이 없던 때였다. 두 아이가 태어날 때도 엄마의 빈자리는 가슴에 구멍이 날만큼 컸다. 그렇게 보고 싶던 엄마를 나는 몇십 년 후 만났기에 다행이지만, 그녀에겐 막막함이 수시로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그녀가 선택한 꿈이 이뤄지길 나는 조용히 응원한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뒤늦게 시작한 공부이기에 함께 가야 한다. 사회복지, 아동복지, 청소년복지, 장애인복지 등 폭넓게 알아가면서 조용한 교실을 열기로 채워 나갈 것이다. 새로운 시작은 누구에게나 떨리게 마련이다. 작은 싹이 캄캄한 흙을 뚫고 세상 밖으로 머리를 밀어올리듯 우리는 그렇게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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