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늦기 전에
더 늦기 전에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1.04.06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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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갓 돌 지난 큰 딸아이를 데리고 이곳으로 이사를 온 것은 30년 전쯤이었다. 처음으로 집을 장만한 터라 그때 시세로는 꽤 비싼 값에 구입을 했음에도 우리 부부는 사뭇 달뜨기만 했다. 집의 외양은 불란서 집이라고 해서 당시에는 꽤나 그럴듯해 보이는 집이었다. 하지만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말이 사람에게만 해당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우리가 뾰족 지붕에 파란색 집으로 이사를 온 것은 봄이 막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해 여름, 집안이 얼마나 더운지 선풍기를 달고 살아야 했고, 겨울에는 방에 떠다 놓은 물이 얼 정도로 웃풍이 어찌나 심한지 난방비를 얼마나 많이 들였는지 모른다.

그때 우리 집은 별채가 두 개나 되었다. 들어오는 마당에 한 채, 우리가 살고 있는 본채 옆에 길고 좁은 한 채가 더 있었다. 그곳에는 우리가 집을 사기 전부터 세를 살고 있었다. 마당에 있던 별채는 흙벽돌의 남향집이었다. 그곳에는 연세가 지긋한 할머니와 직장을 다니던 두 명의 손녀가 살고 있었고 그리고 본채 옆에는 20대의 젊은 남매가 세 들어 있었다. 그나마 셋집에서 받은 돈으로 난방비를 충당할 수 있었던 듯하다.

이사를 온 지 두 해 지나 우리 집에는 작은딸 아이가, 3년 뒤에는 막내아들이 태어났다. 우리 아이들은 세 들어 사는 사람들에게 가족 그 이상으로 귀여움을 받았다. 특히 본채 옆에 세 들어 살던 남매의 방에는 아이들이 수시로 들락날락하는 바람에 내가 다 미안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도 친동생처럼 대해 주었다.

누나와 남동생이었던 남매는 성격이 참 좋았다. 누나는 나와 나이 차가 많이 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남동생은 이제 막 고등학교를 마치고 군대에 가기 전까지 누나와 지내기 위해 머물렀던 모양이었다. 하루는 남동생이 우리 집으로 빗자루를 빌리러 왔다. 그런데 목소리가 얼마나 가늘고 작은지, 그뿐이 아니었다. 무엇이 쑥스러운지 입을 가리고 작은 소리로 웃고 있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남자가 왜 목소리를 그렇게 내며 입은 왜 가리고 웃느냐고 호통을 치고 말았다. 그것도 모자라 나는 남자는 씩씩해야 한다고 그래야 멋진 남자라고 충고를 해 주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이 얼마나 그 사람에게는 상처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는 동생 같은 마음에 충고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 무지였을 뿐이었다. 다섯 해 정도 우리 집에서 세 들어 살던 남매는 누나가 청주로 직장을 잡으면서 이사를 나가는 바람에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그리고 10년 전 우리 집도 예전의 그 집들은 다 헐고 새롭게 본채 하나만 짓고 살고 있다.

세상에는 많은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꼭 사람을 남자 아니면 여자여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양성 평등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차별이 없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우리는 지금 이 순간도 부르짖고 있다. 하지만 정작 우리 사회로부터 차별을 받는 사람들은 그 말조차도 함부로 뱉지 못하고 있다. 차별을 하지 말라고 말하는 순간 차별이 이루어진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남자도 아닌, 그렇다고 여자도 아닌 그저 사람으로 보아주길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평범함이 얼마나 소중한지 평범한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마지막 용기', 얼마 전 남자도 여자도 아닌, 그저 한 사람이길 바랐던 변희수 하사가 남긴 말이 가슴에 박힌다.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것이 마지막 용기가 되기까지 우리 사회는 무엇을 했을까. 더 이상 그저 오롯한 한 사람이길 바라는 또 다른 `변희수 하사'들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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