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을 키워서 먹는 재주
욕을 키워서 먹는 재주
  • 권혁두 기자
  • 승인 2021.04.04 19: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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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잘했든 못했든 모두 제 탓 입니다”. 이 사과의 앞에 달린 군더더기, `잘했든 못했든'은 무슨 뜻일까? 잘한 것도 있다는 뜻일까? 무얼 잘못했는지 잘 모르겠다는 뜻일까? 발언의 주인공은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다. 그는 임대료 인상 폭을 5%로 제한한 개정 임대차법 시행 직전에 자신의 아파트 임대료(월세)를 9% 올린 사실이 드러나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부동산중개업소 사장에게 싸게 계약을 해달라며 맡겼다고 했다가 책임을 3자에게 돌리느냐는 비난까지 겹치자 “모두 내 잘못”이라고 사과했다. 그러면서 `잘했든 못했든'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그가 내놓은 이런저런 해명들로 미뤄볼 때, 일방적 비판이 억울하다는 심정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시세보다 싸게 계약했고, 입주자가 바뀌어 새로운 계약을 해야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시세보다 싸다는 그의 주장부터 반박을 받아 신빙성을 잃었다. 새 계약을 할 때마다 세를 올려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도 서민정치를 주창해온 그의 이미지와 상충한다.

그가 시세보다 싸다고 주장하는 월세 185만원은 최저임금 받는 사람의 한 달 소득이다. 서민들은 주택 월세로만 185만원을 내고 살려면 한 달에 얼마를 벌어야 하느냐며 자신의 소득과 지갑을 돌아보고 있다. 그들의 형편을 헤아렸다면 자신이 받는 월세가 싸다는 말을 이렇게 가벼이 입에 올릴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정치인들은 자신에 대한 비난을 자가 증폭시키는 놀라운 재주가 있다. 용서할 준비기 돼 있는 사람조차도 종국에는 돌아서게 만드는 이 희한한 기술은 여권 인사들이 보다 능란하게 발휘하는 편이다. 조건없는 사과를 하면 될 텐데, 부적절한 변명을 보탰다가 비판을 더 키우는 경우다. 개혁주의자로 평가받는 박 의원까지 이 능력의 소유자가 돼버렸다.

역시 임대차법 시행 직전에 전세를 14.1%나 올린 사실이 드러나 물러난 김상조 전 청와대 정책실장도 사과에 사족을 달았다가 매를 벌었다. 그는 “자신이 살고있는 집의 보증금이 올라 목돈이 필요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김 전 실장 부부의 통장에는 10억원 넘는 현찰이 쌓여 있었다. 정작 목돈이 필요했던 사람은 느닷없이 1억원 이상 전세가 올라 돈 마련에 고생했을 그의 세입자였을 터이다.

요점은 두 가지다. 두 사람 모두 임대료 5% 상한제를 골자로 한 임대차법이 시행되기 직전에 법의 목적을 훼손했다는 사실이 하나다. 두 사람 모두 누구보다 먼저 법의 내용과 시행 시기를 알고 있었기에 사전 임대료(월세) 인상은 의도적 행위로 볼 수밖에 없다. 시세보다 싸다느니, 자신이 부담해야 할 보증금이 올라 어쩔 수 없었다느니 하는 구차한 변명으로 시행하기도 전에 법을 농단한 과실을 덮을 수는 없다.

또 하나는 모두 이 법을 설계하고 견인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김 전 실장은 청와대에서 모든 정책을 조정하고 조율했던 인물이다. 임대차법 역시 그의 손에서 마침표가 찍혔을 것이다. 박 의원은 국회에서 임대차법을 대표 발의했다. 법 개정을 추진하면서 “법 시행에 앞서 과도한 월세 전환과 인상을 경계해야 한다”고 수차례 목소리를 냈던 인물이다. 자신이 우려하고 경고했던 부작용을 몸소 실천한 반전의 주인공이 됐다. `잘했든 못했든'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니다.

나름 관리해온 이미지를 순식간에 추락시키는 `위선자'라는 비판이 아프긴 할 것이다. 내가, 나아가 우리 편이 지탄받을 짓을 할 리 없다는 집단적 자기 과신에 중독돼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됐다는 사실도 안다. 이젠 이런 강박에서 벗어나도 될 것 같다. 실망에 익숙해진 많은 국민은 당신들을 더 이상 도덕주의자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음 놓고 비판을 달게 받는 자세부터 배우기 바란다. 진심을 담아 통렬히 반성하는 모습이라도 보이라는 얘기다. “23%나 올린 국민의힘 주호영 대표도 있는데 왜 우리만 때리느냐”는 따위의 자포자기적 변명은 아득해진 당신들에 대한 희망마저 앗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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