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독(偏讀) 처방전
편독(偏讀) 처방전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21.03.30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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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올 초부터 수필교실 문우들과 `함께 성장 읽기 모임'을 시작했다. 매달 한 권씩 “법정 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에 소개된 책을 함께 읽어가기로 했다. 이번 달 책은 E.F.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이다. 책들 대부분이 법정 스님의 표현을 빌리면 `읽다가 자꾸 덮이는 책'이다. 수필을 주로 읽던 내게는 해독(解讀)해가며 읽는 일이 쉽지 않다. 이해가 되지 않아 다시 읽기를 거듭하니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우선 하루 분량(대략 20~30페이지)을 밑줄을 쳐가며 읽고, 밑줄 친 것 중에서 중요한 부분만 따로 공책에 옮겨 적었다. 그다음에 핵심 내용에 형광펜으로 표시하면서 맥락을 잡아가니 그제야 어렴풋이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동안 술술 읽히는 책들만 찾아볼 게 아니라 매 끼니 밥처럼 기본이 되는 인문서를 꾸준히 읽었어야 했다.

글쓰기 공부를 시작하고부터 지금까지도 늘 이 길이 과연 내가 끝까지 갈 수 있는 길일지 순간순간 고민했었다. 감동과 물음을 던져주는 훌륭한 수필가의 글을 읽어보면 내가 너무 부족하다는 걸 절감했고, 감각적인 언어로 세간을 사로잡은 통통 튀는 수필을 볼 땐 부럽기도 하고 그렇게 참신하지 못한 스스로가 초라해 의기소침해지곤 했다. 그때마다 공감해주고 서로 격려해가며 함께 성장해온 글동무들이 없었다면 아직 이 길 위에 남았을지는 분명치 않다.

글을 쓰면서 점점 내 삶에서 불순물이 빠져나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수필을 `삶을 정제(精製)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수필이 곧 삶이요, 좋은 삶을 살아야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다. 그렇기에 좀 더 잘 살려고 애썼고, 전문성을 키우고자 표준이 되는 잘된 수필들을 찾아 읽었다. 다양한 방면의 독서를 통해 균형 잡힌 생각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빨리 수필을 잘 쓰고 싶은 욕심에 편독(偏讀)해 왔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 독서 모임을 하면서, 이제부터라도 편독(偏讀)이 아닌 두루 읽는 편독(遍讀)으로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책상 위에는 매일 읽는 책과 작가 수첩 등을 넣어두는 책 바구니가 하나 있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대다수가 수필집들이다. 내 나름의 처방전이랄까, 일단 그중 `오두막 편지'와 `무서록' 두 권만 남기고 다 꺼내 책장에 도로 꽂았다. 그리고 작가 수첩과 공책, 독서 모임 책, 시집 한 권, 원서 동화책 한 권만을 넣었다.

내친김에 책들에 대한 용량과 용법을 적어 바구니에 붙여본다. △시집·물약. 하루 1g. 입안에 느껴지는 풍미를 음미하며 호록호록 소리 내가며 마실 것.△원서로 된 동화책·알약. 하루 한 캡슐. 노화 방지에 탁월하여 말랑말랑한 어린아이 마음결을 되찾아 줌. (주의 및 부작용:달짝지근하다고 과다 복용하게 되면 밥맛이 떨어질 수 있음) △수필집- 씹어먹는 알약. 아침, 저녁으로 한 봉지씩. 다량의 필수 영양소가 들어 있으니 천천히 꼭꼭 씹어 먹을 것. △인문학- 가루약. 하루 20~30mg 내외. 순수함량이 높은 가루 형태의 에너지원. 한 번에 먹기 어려우면 여러 번에 나눠 먹어도 무방함. 물에 타서 녹여 먹을 것. 꾸준히 복용할 것.(주의 및 부작용:급하게 삼킬 시에 사레들릴 수 있음) 바구니 속 영양제들이 어숭그러하니 내 맘에 흡족하다. 어쩌면 이 길 끝까지 갈 수 있을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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