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늙은 호수
잘 늙은 호수
  • 김용례 수필가
  • 승인 2021.03.25 19: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김용례 수필가
김용례 수필가

 

공원에 들어서는 순간, 안도현 시인의 `잘 늙은 절 화엄사' 시구가 스쳐간다. `그래 이 호수도 잘 늙었구나.' 아직 푸른 잎도 꽃도 없는 호숫가는 조용하다. 오래된 호수인 듯 큰 나무들이 많다. 자식들 다 키워 도시로 보내고 편안한 노후를 보내는 촌로 같아 보인다. 그리 크지도 않고 요즈음 조성하는 호수처럼 분수도 없고 호수둘레를 쳐놓은 나무로 된 난간도 군데군데 삭아있고 떨어져 나간 곳도 있다. 세월의 흔적이 보인다. 늙었다는 것은 그 육신이 닳았다는 뜻이다. 오래 사용했으니 여기저기 고장이 나는 것이 당연하다. 외형은 초라해도 무시할 수 없는 기품이 느껴진다. 무엇 때문에 이런 느낌이 들까 생각하며 천천히 호수를 돌아보았다. 오래된 나무와 호수 옆에 있는 성당의 그림자가 물속에 있다. 호수는 성당과 나무와 하늘을 담고 있는 한 폭의 서양화다. 단순하지만 단조롭지 않은 시선이 느껴진다. 성당과 아름드리나무와의 조화미였다.

오창 구룡공원에 있는 이 호수는 구룡 소류지라고 하는 작은 저수지였단다. 지금은 신도시가 되었지만 얼마 전까지 논과 밭에 물을 주던 저수지. 도시개발로 논과 밭에는 건물이 들어서고 학교가 생겨났다. 오창대로 건너 중앙공원의 산길을 따라 오창 호수공원의 녹지와 연결되는 곳이다. 처음 봤을 때는 호수라기보다는 작은 둠벙 같았지만 호수 둘레 길을 걷다가 성당과 호수가 있는 풍경이 참 잘 어울려 좋은 느낌이 들었나 보다. 서로 잘 어울린다는 것. 함께 있어 아름다운 것. 그래서 좋은 풍경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래된 것은 새것, 어린 것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이 있다. 힘 빠진 늙음이 아니라 오랜 세월 잘 살아온 잘 늙음을 보는 것 같다. 잘 늙어야 한다는 것은 세월 가는 대로 나이만 먹는다고 잘 늙는 것은 아니다. 안도현 시인은 “잘 늙었다는 것은 비바람 속에서도 비뚤어지지 않고 꼿꼿하다는 뜻이며, 그 스스로 역사이거나 문화 일부로서 지금도 당당하게 늙어가고 있다는 뜻이다”라고 했다.

호수를 걷다 보니 양지바른 제방 둑에는 보라색 제비꽃과 노란 민들레꽃이 잔잔한 꽃무늬 치마를 입고 있는 듯 예쁘다. 이 호수에서 나고 자란 나무인지 호수가 생겨나면서부터 여기서 자란 나무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저 아름드리나무가 없었다면 그저 작은 둠벙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름드리나무가 호수와 함께 사람들을 반긴다. 물은 흘러가지만, 나무는 이곳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머지않아 이 구룡공원을 문학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란다. 조용하고 아늑한 이곳에 시와 수필로 감성까지 곁들인 공원으로 거듭나지 않을까 기대가 크다. 함께 걷던 문우도 연신 편안하다는 말을 한다. 외형만 잘 가꾸는 것이 아니라 가슴까지 따스해지는 자연과 한 문장이 되어 오창의 새로운 명소가 될 것 같다. 새것에서 느낄 수 없는 깊이와 자연스러움으로 편안함을 준다. 구룡공원은 사람이 많은 도심 속이 아닌 도심을 비켜선 곳에 있어 혼자만의 혹은 둘이 조용히 여유를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오랜 시간 비바람을 견뎌온 나무들이 이 호수를 잘 늙어 보이게 만들었다. 잘 늙어가는 장소나 사람에게서는 흉내 낼 수 없는 향기가 있다. 명성은 없어도 품위와 깊이를 지니고 당당하게 늙어 가면 아름답다.

누구라도 구룡공원, 잘 늙은 이 호수 둘레 길을 걸어보면 나처럼 단박에 반하게 될 것이다. 봄 햇살이 호수 위로 쏟아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