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볕은 좋은데
봄볕은 좋은데
  • 이명순 수필가
  • 승인 2021.03.24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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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명순 수필가
이명순 수필가

 

도토리묵을 쒀서 친정에 가지고 갔다. 묵밥은 크게 준비할 것도 없는 간단한 점심이지만 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나, 세 모녀가 함께 묵밥을 맛있게 먹었다. 늘 입맛이 없다고 하는 어머니도 모처럼 새로운 음식이라 그런지 잘 드셨다.

점심을 먹고 나니 주말 오후의 봄볕이 따뜻했다. 배도 부르니 소화도 시키고 운동도 할 겸 여동생과 같이 지난가을 들깨 베어낸 자리에 앉아 들깨 뿌리를 뽑았다. 넓지 않은 텃밭이라 기계로 갈아엎을 수도 없어서 뽑아 낸 후 흙을 털어 버려야 했다. 어느새 봄이라고 대파와 쪽파도 파릇하게 올라왔다. 사이사이 풀을 뽑으며 올봄에는 무엇을 심을까 이야기했다.

녹내장이 심해 눈이 침침하고 건강도 안 좋은 어머니는 농사일할 수 없는데 시골에 살며 빈 땅으로 놀리는 것도 용납이 안 되는 듯 진작부터 걱정이 태산이셨다. 동네 이웃에게 밭을 갈아 달라고 해야 하는 것도 걱정이고, 남들은 벌써 감자도 다 심었다는데 우리는 언제 심어야 할지 걱정이고, 이것저것 심으려면 골을 내고 비닐도 씌워야 하는데 그것은 또 어떻게 해야 할지도 걱정이다.

어차피 텃밭 농사는 어머니 때문에 친정집에 매일 드나드는 여동생 몫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당신이 다 주관을 해야 일이 진행된다고 믿으시고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 건강 탓에 또 걱정만 앞선다. 힘드시니 텃밭 농사도 다 관두자 하면 빈 밭에 풀만 무성할 테니까 걱정이고, 손쉬운 작물로 조금만 심자 하면 신경 쓸 일이 또 걱정이라 이래도 저래도 걱정뿐이다. 여동생과 내가 알아서 하겠다 해도 못 미더워하신다.

여동생이 들깨는 벌레도 많고 가을에 베어 낸 후 말리고 터는 것도 힘들다며 손이 많이 안 가는 땅콩을 심자 하니 거름이 없어서 안 된단다. 그럼 올해는 고구마를 이곳에 심자 하니 그것도 안 된단다. 콩을 심자 해도 안 되고 이것저것 말해도 다 안 된다 해서 그럼 뭘 심는 게 좋으냐고 하니 결국 또 들깨밖에 심을 것이 없단다.

들깨 심을 곳은 제쳐 두고 다른 곳은 늘 하던 대로 고추, 가지, 오이, 토마토, 상추 등을 몇 포기씩 심어 여름내 반찬거리나 하자고 하다가 내가 올해는 치커리도 좀 심자고 했더니 어머니는 그걸 심어 누가 먹냐며 역정을 내신다. 여동생과 내가 와서 먹겠다고 해도 탐탁지 않아 하는 어머니. 우리는 어머니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기에 더 이상은 입을 다문다.

예전에 어머니는 좁은 텃밭 구석구석에 여러 가지 채소들을 옹기종기 심어서 유용한 찬거리로 잘 활용했다. 하지만 지금의 어머니는 매사가 다 걱정이다. 여동생과 나는 미리 걱정하지 말고 순리대로 살자고 하는데 어머니는 당신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고 느끼시는지 서운한 내색을 비춘다. 모든 게 다 귀찮고 삶의 의욕도 없는 어머니다. 완고한 어머니께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시라고 말씀드리지만 쉽지 않다.

걱정한다고 걱정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걱정이 더 커질 뿐이다. 늘 걱정뿐이던 짚신장수와 우산장수 어머니도 생각을 조금 바꾸니 매일 매일이 행복해졌다고 한다.

따스한 봄볕처럼 어머니의 생각도 조금만 바뀌어 걱정과 한숨뿐인 날들이 아닌 소소하게 웃을 수 있는 날들이기를 바라며 어머니를 통해 내 삶의 나날도 들여다본다. 가끔 돌이켜 보면 나도 어머니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고 닮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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