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추억이 될 때
기억이 추억이 될 때
  •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 승인 2021.03.24 20: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교육현장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새로 개설한 박사과정 수업의 열기가 뜨겁다. 처음엔 염려가 컸다. 박사과정생만 들을 수 있도록 개설했더니 1학년 신입생 2명만 신청을 했고 수강생 2명과 교수인 나를 합하여도 셋이 매주 발표하기 버거운 수업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여 함께 공부할 청강생을 모집하였다. 다행히 이미 졸업한 박사 네 분, 박사과정 수료자 세 분 하여 모두 열 명이 공부하게 되었다. 어제 함께 읽은 글의 제목은 `문자와 교육'이었다. 저자는 플라톤 대화편 `파이드로스'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를 전했다.

에집트의 나우크라티스라는 도시에 테우트라는 유명한 신이 살고 있었다. 이 신은 수와 계산, 기하학과 천문학, 그리고 장기와 골패 등 인간에게 유용한 여러 가지 발명을 하였다. 그중에서도 테우트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은 문자였다. 그런데 그 당시 에집트를 다스리던 왕은 타모스로서 희랍인들이 에집트의 테베라고 부르는 북부의 큰 도시에 살고 있었다.

테우트 신은 타모스 왕에게 가서 자신의 발명품들을 보이면서 그것을 에집트 전체에 널리 보급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특히 자신이 발명한 문자에 대해서는 에집트인들을 더 지혜 있게 또 더 잘 기억할 수 있게 해주는 기억과 지혜의 영약이라고 힘주어 자랑하였다. 그러자 타모스는 문자가 기억에 도움이 된다고 말하지만 문자는 그것을 배우는 사람의 마음속에 망각이 자라게 할 뿐이고, 그것을 배우면 문자에만 의존하여 기억을 소홀히 하게 되어 자신의 내적 능력에 의하여 기억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낯선 부호에 의해서만 기억하려 하게 된다고 문자를 보급할 수 없는 이유를 밝혔다. 게다가 사람들은 문자 때문에 배움이 없이도 여러 가지를 주워듣게 되고 실지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많이 아는 것처럼 보이게 되어 참으로 지혜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딱한 사람이 될 뿐이라 비난하였다.

문자는 보급될 수 있을까?

아마도 테우트 신의 주장이 타모스 왕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였는지, 지금 우리는 문자가 널리 보급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타모스 왕이 염려한 문자의 딜레마는 여전히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문자는 진리를 표현하는 매체가 되지만, 표현되는 순간 화석화되어 진리의 생명력은 사라지게 된다. 그럼에도 진리를 다른 방식으로는 도저히 기록할 수 없었다. 영상 역시 텍스트인 문자를 기반으로 하니 말이다. 하여 인류는 화석화된 문자를 살아있는 사람을 통해 전하게 함으로써 다시 살려내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아마도 지금의 선생은 문자에 생명을 불어넣어 살아있는 지식으로 만들어내는 그 임무를 담당한 사람들이다.

학기 초가 되면 캠퍼스에 여러 종류의 플래카드가 걸린다. 대부분은 우리 대학 출신의 연구자나 학생이 대학에 교수로 임용된 것을 축하하거나, 유명한 대회에서 기량을 겨루고 받은 수상내역이 게시된다. 그런데 올해 눈길을 끈 것은 `수필가로 등단'한 동문을 축하하는 플래카드였다. 학교를 같이 다닌 선배가 수필가로 등단했다니 기쁜 마음으로 선배의 수필집을 주문하였다. 초등학교 교사로 30년을 재직하면서 엄마로, 작가로, 예술가로 살아온 선배의 삶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시간은 기억을 추억으로 만든다' 30년차 예술가 선생의 따뜻한 눈으로 바라본 삶은 시간을 통해 기억들이 추억들로 쌓여가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따뜻한 선배의 글과 환한 봄볕에 기대어 눈을 감으니 30년 전 대학 입학 때가 절로 떠오른다. 아,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문자의 힘이 아니었다면 선배의 눈으로 관조한 세상을 함께 바라볼 수 있었을까? 문자가 아니었다면 잊혔던 기억이 추억으로 살아날 수 있었을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