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피는 꽃
365일 피는 꽃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1.03.16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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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사무실을 나서며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든다. 최근 통화목록에서 `내꺼'를 누른다. 몇 번의 신호가 가고 숨소리가 느껴지자, “어디?” 짧게 묻는다. “동사무소 언덕” 늘 그렇듯 짧은 답이다. “알써” 단 답에 대꾸는 줄임말이다. 휴대폰의 종료 버튼을 누르고, 서둘러 동사무소를 향해 언덕을 오른다. 아내의 모습이 보이자 서로 손을 흔들고 잰걸음이다. 그렇게 만나 집으로 향해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다. 그리고 한 곳에 이르러 멈춘다. 이내 잡았던 손을 놓고 마스크를 벗어 내리고 길게 자라목을 내민다. “넘 좋다!” “황홀하네 아~” 대문 옆 울타리 역할을 하는 백매화가 달달한 향으로 마중한다.

두 딸에게 피어 있는 꽃을 알려준다. 분홍색 기운을 소심하게 섞어 꽃을 달고 수줍게 늘어진 `미선이', 암갈색의 거친 나뭇가지에 새하얀 홑잎을 다부지게 달아낸 `매화'. 꽃망울이 금세 터질 듯 부푼 `명자'. 아직 덜 녹은 땅을 뚫고 나온 대견한 녀석인데 저녁이 되자 싸늘했는지 꽃잎을 닫은 노란색 샤프란 `스프링 크로커스'. 그리고 뒤편에서, 나도 혹한의 겨울을 이겨냈다고 봐 달라는 복수초가 꽃 이야기에 참여한 주인공이다.

뜰에는 조만간 터질 앵초, 히아신스, 수선화, 튤립, 치아노독사와 이미 화려한 꽃을 피우고 너른 터를 차지한 구근 아이리스, 시큼한 맛에 바로 뱉게 하는 앵두, 팥 심을 때 피는 팥꽃이 삼사월을 수놓는다.

오뉴월에는 다양한 수종의 아이리스가 강인한 대를 올려 고귀한 향을 내고, 너무 낮고 작아 세심히 찾아야 보이는 초롱초롱 은방울꽃, 살아서 못다 한 사랑이 죽어서도 이어지지 않는 화왕 모란과 매년 땅에서 순을 올려 꽃을 피우는 작약이 뜰과 텃밭을 채운다.

장마가 지나고 무더운 여름엔 역시 시원한 볼륨과 순수한 색을 자랑하는 수국이 그늘을 화려하게 메운다. 더워진 물에서는 수줍게 낮에만 꽃을 피우고 밤에는 잠을 자는 수련이 함께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전하는 상사화와 주먹보다 더 커다란 꽃을 피우는 알리움도 여름에 시원하게 뻗어 올려 커다란 꽃을 선보이는 녀석이다.

가을은 역시 국화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집안을 온통 자신의 향으로 덮어버리는, 그동안 품어왔던 기를 여지없이 퍼트려내는 녀석이다. 그리고 시원한 그늘 아래 꽃무릇이 강한 선홍빛으로 돋보인다.

마지막 계절 겨울이다. 11월은 태양보다 강한 색을 발산했던 칸나도 꺾이는 때다. 이맘때 바닥에 피는 꽃은 서리꽃이다. 날카롭지만 새하얀 꽃잎을 올린다. 그 사이에서 보라색 꽃이 가득하다. 붉은색 꽃술을 가진 샤프란이다. 그리고 혹한의 겨울이다. 형형색색이 뜰을 채우지 않는다고 낙담할 일은 아니다. 겨울은 미니멀리즘의 뜰을 감상하게 해준다. 눈꽃과 얼음꽃이 나뭇가지 위에 잔디밭에 텃밭에 만발이다.

1년 365일 꽃을 본다는 것은 많은 시행과 경험 끝에 얻은 행복이다. 작은 뜰이지만 목본류에서 초본류까지 가짓수로만 300여 가지가 넘는 것들이 모여 산다. 생명의 본질은 자유라 하며 구역을 벗어나는 녀석들의 생태를 이해하며 꽃을 피우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흘렀다. 구근류만 하더라도 계절별로 심을 시기와 깊이, 토양의 성질, 온도가 다르고, 장마철엔 캐내어 썩을 수 있기에 건냉한 곳에 보관하며 서로 닿지 않도록 보살펴야 하는 수고로움을 즐겨야 한다. 씨앗도 광발아성인지 암발아성인지를 구분해야 하고, 발아온도를 따져야 하니 기록이라는 말은 일상이 되었다.

너무 많은 것이 예상치 못하게 벌어지고 머리가 혼란스러워지는 상황의 연속이다. 하지만,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모두 받아들인다. 받아들이고 배우고 시도하고 경험으로 쌓는다. 자연의 일환에서 받아들이지 못할 일을 없다. 300여 가지를 넘는 녀석들을 온전히 알게 되었을 때 뜰은 1년 365일 자신을 피우며 자신들의 영역을 확대해 나가는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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