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 할머인 선녀인기라'
`니 할머인 선녀인기라'
  • 장민정 시인
  • 승인 2021.03.1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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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장민정 시인
장민정 시인

 

생전에/탐스런 달리아꽃 좋아하시고/새벽길 더듬어 정한수 올리며/기도하시던 할머니/돌아가신 뒤 우리 할아버지/니 할머인 선녀인기라/다둑다둑 그리워하신다.// 나 죽어/이 세상 흔적 없을 때/나는/누구의 무엇으로 남을까

-졸시 `니 할머인 선녀인기라'중에서



`아내를 선녀로 생각할 수 있는가?'여러 사람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누군가는 지지고 볶고 산 사이에 어떻게 선녀가 가능하냐며 도리어 되묻기도 한다. 삶이란 것이 아름다움은 아니지 않는가?

만나면 잘하네 못 하네 불만을 쏟아내기 바쁘고 아무것도 아닌 것도 기를 쓰며 탓하고 잔소리하며 투닥거린 생각이 나서 머쓱해하는 사람이 더 많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누군가의 선녀가 되고 싶은 이기심을 어쩌랴,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하던 1950년대, 할아버지는 고을에 중학교가 없어 타지로 유학할 형편이 못 되는 아이들이 많음을 알고 중등과정의 공민학교를 만드셨는데 그 1회 졸업사진이 잊히지 않는다. 앞줄에 앉아있는 교사들 중간에 교장 할아버지와 나란히 이사장 격?인 할머니가 앉아 계셨다. 드물게 현대적이었던 할아버지의 사랑과 존중을 한몸에 받은 우리 할머니가 나는 부럽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함께 날마다 새벽이면 치르는 의식이 있었다. 먼동이 트기 전, 깜깜한 어둠을 헤치고 동네 샘에 가셔서 한 두레박의 물을 제일 먼저 길어 오셨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거나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 날도 쉬는 법이 없으셨다. 그렇게 길어 온 물은 제대 위에 정한수로 올려지고 두 분은 나란히 앉아 한 시간도 넘게 기도문을 외우셨다.

동생들이 많은 탓에 나는 항상 할머니 옆에서 잠을 잤으므로 날마다 잠결에 듣던 두 분의 기도문 소리는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내 입에서 술술 흘러나온다. `사대칠언성공여레 지기금지 여레대강'기도문의 뜻도 의미도 알지 못한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반야바라밀다심경, 뭐 그런 것일 게다 짐작하면서, 하지만 양반다리를 하고 나란히 앉아 앞뒤로 주억거리다 옆으로 몸을 기울기울 하면서 외우시던 모습은 어린 마음에도 또록또록하게 각인되어 있다.

끼니때마다 군식구들이 끼어 앉는 것은 물론이고 일꾼들을 시켜 폭우에 떠내려간 다리도 놔주고 이웃들에게 곡식도 자주 나누어 주던 할머니. 할머니는 화단의 달리아를 보며 너무 곱다 하시는가 하면 거칠어진 손이 부끄럽다며 치마 속에 숨기고 환히 웃던 소녀 같은 모습도 떠오른다. 그런 천진함을 잃지 않으신 할머니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읽힌다.

할머니의 착한 천성에 할아버지가 감동했는지, 하여간 두 분을 생각하면 마음은 온돌방 아랫목처럼 따뜻해진다. 생각할 때마다 두고두고 닮고 싶은 마음에 부러움까지 얹혀진다.

어느 날 할머니가 곳간에 계셨는데 할아버지는 마당을 서성이고 계셨다. 뒷짐을 지고 헛기침을 하면서 서성이는 모습은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의 할아버지 버릇임을 엄마가 귀띔해 줘서 알고 있었다. 못마땅한 일일지라도 할머니가 하시는 일은 제지하지도 탓하지도 않는 할아버지, 우리 먹기에도 빠듯한 곡식을 덜어내는 할머니를 차마 말리지 못하고 서성이던 할아버지 모습은 두고두고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부부라면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살아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 굶는데 쌀밥 먹을 수 없다며 잡곡밥을 하게 하시던 할아버지, 근면하고 겸허하면서도 가족사랑이 남달랐던 할아버지는 요샛말로 바람의 바짜도 모르시고 아내를 섬기듯 사랑하시고도 곁을 떠난 후에는 끝내 선녀였다고 추억하시는 할아버지. 생각날 때마다 할머니가 부럽고 할아버지가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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