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와 백로
까마귀와 백로
  •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 승인 2021.03.11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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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論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천자문을 막 뗀 어린 학동들을, 본격적인 유학의 세계로 이끌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한문 교과서가 바로 사자소학(四字小學)이다. 주자의 소학(小學)과 여러 종류의 다양한 문헌에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 할 윤리 도덕 등을 사자일구(四字一句)로 엮은 사자소학에는 “近墨者黑(근묵자흑) 近朱者赤(근주자적)”이란 구절이 있다. 검은 먹을 가까이하는 자는 검게 되고, 붉은 것을 가까이하는 자는 붉게 된다는 말로, 어떤 환경 속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 함께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 모습이 이렇게 저렇게 형성돼 간다는 것을 일깨우는 가르침이다.

사자소학은 위의 구절에 이어서 “蓬生麻中(봉생마중) 不扶自正(불부자정)” 즉, 쑥이 곧게 뻗어가는 삼밭에서 자라면 따로 쑥을 붙잡아 주지 않아도 바르게 큰다는 가르침과 함께, “白沙在泥(백사재니) 不染自陋(불염자루)” 즉, 흰 모래가 진흙 속에 있으면 따로 물들이지 않아도 저절로 더러워진다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이는 앞서 소개한 “近墨者黑(근묵자흑) 近朱者赤(근주자적)”의 가르침과 근본적 맥락은 전혀 다르지 않다. 글자 몇 자만 다르게 배열된 동일한 의미의 “蓬生麻中(봉생마중) 不扶自直(불부자직) 白沙在泥(백사재니) 與之皆黑(여지개흑)”이란 가르침은 사기(史記)에도 나온다. 또 사기 이전에 씌여진 순자(荀子)의 권학편(勸學篇)에도 같은 의미의 “蓬生麻中(봉생마중) 不扶而直(불부이직)”이란 구절이 등장한다.

불교에는 “향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생선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난다”는 가르침이 있다. 인간은 누구라도 자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는 존재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냄새인 향(香)을 가까이하고, 나쁜 냄새인 취(臭)를 멀리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향과 취를 차별함 없이 정확히 구별하면서 향이 필요할 때는 향을, 취가 필요할 때는 취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면 된다. 된장찌개에는 된장을 넣어야 하지만, 밭에 거름이 필요하다면, 무조건 똥이 더럽다고 피하거나 멀리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악취가 나는 똥도 잘 모아서 거름으로 유용하게 잘 사용하면 그뿐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향기든 악취든 한 가지 냄새에 익숙해지면 그 냄새에 무뎌지고, 끝내 냄새를 맡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간과하는 일 없이, 향내와 악취 중 어느 한 쪽에도 집착하거나 물듦이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바르게 보면서, 향기와 악취의 장단점을 잘 파악한 뒤,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지혜롭게 선용(善用)하는 것이 귀한 일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공자님은 말씀하신다. “三人行必有我師焉(삼인행필유아사언) 擇其善者而從之(택기선자이종지) 其不善者而改之(기불선자이개지)” 즉,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착한 사람을 보면 그를 따라 본받으면 되고, 착하지 않은 사람을 보면 그를 반면교사로 삼아서 자신을 되돌아본 뒤, 그 착하지 못함을 고쳐주면 된다는 의미의 가르침이다.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생선 비린내가 나고, 검은 먹과 가깝게 지내면 자신도 알게 모르게 검게 변하기 때문에, “백로가 까마귀 노는 곳에 가지 않는 것도 의미 있다. 그러나 공자님의 가르침처럼, 한 발 더 나아가 지혜의 눈으로 목전의 현실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뒤, 주변 인연들의 훌륭한 점은 본받고, 잘못된 점은 고쳐 줄 수 있다면, 굳이 까마귀를 피해야 할 필요는 없다. 흔쾌히 낮은 곳의 까마귀에게 다가가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귀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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