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명창
귀명창
  • 공진희 기자
  • 승인 2021.03.09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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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공진희 부장(진천주재)
공진희 부장(진천주재)

 

전국의 청춘들이 4박5일 연수에 참여했다.

20명 남짓 연수동기들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으로 연수일정을 소화해나갔다.

그 프로그램 가운데 판소리 강좌가 특히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고수와 함께 등장한 판소리 명창(그들이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이 강사로 나서 판소리에 대한 간략한 강좌를 하고 판소리 한 대목(춘향가인지 심청가인지 역시 기억나지 않는다)을 들려 주었다.

명창과 고수의 숨소리까지 들어가며 감상하는 무대는 처음이었다.

TV를 통해 듣던 판소리와는 차원이 다른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한 친구가 공연 도중에 `얼쑤'하며 추임새를 넣었다.

판소리의 감흥에 취해 있던 동기들의 얼굴이 순간 당혹감과 억지스런 웃음으로 묘하게 일그러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튀어나온 추임새가 우습기도 했거니와 그 상황이 명창에게 실례가 되는 것은 아닌지 당혹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명창은 개의치 않고 미소띤 얼굴로 나머지 대목을 완창했다.

뒤이어 연수생들이 한소절을 함께 배워보는 시간이 마련됐다.

모두 스펀지가 되어 그 소절을 빨아들이던 그 순간 명창이 환한 얼굴로 `바로 여기서 얼씨군겨' 하며 소리치자 판소리 마당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판소리가 2003년 유네스코에 `인류 구전 및 무형 유산 걸작'으로 선정되면서 그 가치를 전 세계인들에게 인정받고 있다.

판소리에 귀명창이라는 말이 있다.

판소리를 즐겨 듣는 사람들 가운데 단순한 애호가 수준을 넘어 소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지식을 바탕으로 소리를 제대로 감상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판소리를 할 줄은 모르더라도 듣고 감상하는 수준이 판소리 명창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는 뜻이다.

`귀명창이 좋은 소리꾼을 낳는다'거나 `귀명창 있는 곳에 명창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귀명창은 판소리의 창조적 발전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조력자이다.

`점마는 뭐하는 놈인데 이렇게 심사를 잘하냐?(남진). 작곡가 하십니다(장윤정). 아 그러니까 귓구녕이 뚫려있고만(남진). 여기에 오신 모든 관중들께서도 귓구녕이 뚫려 있으셔서 심사를 잘하리라 믿습니다.(김성주)'

지난 해 한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작곡가 조영수의 심사평을 듣던 가수 남진이 장윤정과 여담으로 나눈 얘기가 걸러지지 않고 방송돼 시청자들을 감탄하게 만들었다.

이 여담을 사회자 김성주가 재치있게 받아 넘겼다.

여기서 가수 남진은 `귓구녕이 뚫려 있다'는 표현으로 `귀명창'을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

좋은 가수가 되기 위한 기본은 잘 듣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만물과 접촉하고 얽히어서 날마다 마음 속에는 다툼이 일어난다……(말이) 마치 활 틀에 건 화살과 같이 튕겨나가는 것은 시비를 따져대는 짓을 일컬음이다. 마치 명석한 양 머뭇거리는 것은 그 승리를 고수하려는 고집을 일컬음이다. (그러한 사람이) 마치 가을과 겨울의 낙엽처럼 시드는 것은 날마다 소멸해 감을 말하는 것이다'(장자 제물론 중에서)

품격잃은 언어, 약속을 지키지 않는 말들, 아니면 말고 식의 무책임한 말잔치의 시대에 살고 있다.

말 자체에 끄달려 다니지 말고 그 말의 진정성과 가치, 상대방에게 마음 한구석을 내어주는 배려를 읽어낼 줄 아는 귀명창으로 돌아가자.

본래 우리 모두는 귀명창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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