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3
날개 3
  • 반영호 시인
  • 승인 2021.03.04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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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論
반영호 시인
반영호 시인

 

부서진 양궁 날개를 보수해 보려고 애를 썼다. 부러진 날개에 대나무를 쪼개어 덧대보았지만, 원래대로 복구되지 않았다. 활 판매점에 이 제품의 날개를 구할 수 있느냐고 문의를 해 보았지만, 원체 오래된 활이라 기종이 단종되었으며, 다른 회사 물건도 장착 방식이 전혀 달라 대체할 수 있는 방도가 없단다.

결국, 날개를 잃은 양궁을 포기했다. 대신 할아버지께서 쓰시던 국궁을 꺼냈다. 화살과 깍지가 없을 뿐 본체는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 겉보기에는 멀쩡하나 오래된 활인데 과연 제 기능을 발휘할까에 대하여는 장담할 수 없었기에 먼저 줄을 걸어 보기로 했다. 양궁 날개가 부서지는 것을 경험해 보았었다. 양궁보다 훨씬 오래된 그야말로 골동품 같은 활이니 만지는 것부터 조심스러운 활이다.

걱정과는 달리 골동품 같은 활은 나의 염려를 비웃듯 시위 고리가 양끝 고자에 척 걸린다. 천천히 당겨 보았다. 무난히 귓불까지 당겨진다. 파르르 떨리는 팔에서 엄청난 파워가 느껴진다. 이 무서운 힘은 운동 삼아 사용하기에는 장난이 아니다. 이 활은 사람을 죽일 수 있도록 제작된 활이다. 그야말로 병기다.

활은 오랫동안 전쟁 무기로 사용되었다. 상고 시대를 기록한 중국의 역사서에는 예의 단궁(檀弓)이나 고구려의 맥궁(貊弓)과 같은 활의 이름이 있다. 크기를 기준으로 장궁과 단궁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말을 타고 사용하는 활은 기동의 편의를 위해 길이가 짧은 단궁으로 길어도 1미터를 넘지 않는다. 고구려의 벽화에 나온 수렵도를 보면 말을 타고 각궁을 사용하여 사냥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고려에서 조선까지 시행된 무과 과거시험에서 활쏘기는 기본적인 평가 항목이었다. 조선의 무과에서 초시와 복시에는 목전이 사용되었다. 과녁은 240보 거리에 놓였으며 기본으로 3발을 쏘아 관중하는 활마다 7점을 주었다. 그보다 먼 과녁에 대해서는 5보마다 1점을 더하였고 50보를 넘기면 과녁을 맞히지 못하였어도 1점을 주었다.

궁도(弓道)는 각궁으로 대나무 살을 쏘아 과녁을 맞혀 승부를 겨루는 한국의 전통 궁술 스포츠이다. 양궁에 대비하여 국궁(國弓)이라고도 부른다. 본래 궁도는 무과 시험의 과목으로 정해져 있는 무예였으며 무예도보통지의 무예이십사반 가운데 하나였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종류의 활이 만들어졌으나 현재까지 제작 기법이 이어져 오는 것은 각궁뿐이다. 전국체육대회의 한 종목이다.

활과 화살의 유물은 아프리카 지역에서 최소 2만 년 전 이전인 중석기 시기에 사용된 것이 발견되었다. 활은 사냥과 전쟁을 위해 전 세계에 걸쳐 사용되었다. 한국의 경우도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에 이르는 돌화살촉 유물이 발굴되고 있다. 화살촉이 금속으로 대체된 것은 철기시대 이후이다.

할아버지께서는 본래 매사냥을 즐기셨다. 갓 부화한 어린 새끼를 내려와 공을 들여 기르며 키워, 성장하면 사냥을 시켰다. 매 방울이며 발고리, 눈가리개, 쇠가죽팔걸이, 매 망태기 등을 손수 만드셨다. 어린 시절 나는 그 유기물들을 엿과 바꾸어 먹었다. 유기물뿐 아니라 그 물품을 만드는 공구들과 재료들도 엿으로 바꿔 먹었으니 참 철부지 때의 이야기인데 아직도 그 물건들이 눈에 선하다. 그 유기물들을 보관하던 함지박(연장통이라 불렀다)만이 큰 형님네 집에 남아 있다.

조부께서는 매를 이용해 꿩을 사냥하셨을 테지만 멧돼지나 노루 등 큰 짐승은 활로 사냥하였을 것이다. 당기기에도 벅찬 이 활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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