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지역의 3·1운동 이야기
충북지역의 3·1운동 이야기
  • 김도연 충북문화재연구원 중원학연구팀장
  • 승인 2021.03.01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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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김도연 충북문화재연구원 중원학연구팀장
김도연 충북문화재연구원 중원학연구팀장

 

3·1운동이 발생한지도 어느덧 100년이 넘었다. 어릴 때에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때의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100년이라는 시간 때문인지 먼 옛날의 역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렸을 때 배웠던 3·1운동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식을 진행하고 체포된 후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는 내용이 떠오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후의 이야기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오늘은 충북지역의 3·1운동에 대해 살펴보면서 알게 된 몇 가지 사실을 소개해볼까 한다.

충북지역에서는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 의해 본격적으로 만세운동이 시작되었을까? 아마도 이 답을 아는 사람은 적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보면 대체로 3월 19일 괴산장터에서 본격적인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고 알려졌는데 지금 이곳에 가보면 만세운동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의문이 드는 점은 만세운동이 서울에서 독립선언식을 진행하고 17일이나 지난 후에야 발생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는데 3월 2일 인종익 선생이 청주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려다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된 것이다. 아마도 이 독립선언서가 압수되지 않고 배포되었다면 더 일찍 만세운동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괴산장터의 3·1운동을 주도한 인물은 누구일까? 아마 이 분야의 전공자가 아니면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지만 의외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람이다. 바로 소설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이다. 물론 홍명희를 북한 정권에 기여한 인물이라고 하여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분들도 많은데 그렇다 하더라도 괴산장터 3·1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이라는 사실 정도는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3·1운동의 방법은 어땠을까. 보통 3·1운동을 상상한다면 손에 든 태극기를 펄럭인다거나 종이로 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모습을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만세운동 방법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횃불을 들고 하는 것이다.

충북지역에서는 청주 강내면 태성리에 거주했던 조동식 선생께서 처음 시작했다고 알려졌는데 당시 기록을 보면 3월 23일 밤 산 정상에서 시작하여 24일과 26일 밤에도 이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인근 지역으로 퍼져 4월 1일 청주군 8개 면에서는 동시에 산에서 불이 피어오르며 만세 함성으로 메아리쳤다고 하며 멀리 충남과 강원도 지역까지 전파되었다고 하니 횃불을 들고 진행하는 만세운동이 있었다는 사실도 흥미로운 점이다.

마지막으로는 충북지역의 3·1만 세 운동은 얼마나 오래갔을까. 삼일운동자료를 종합한 국사편찬위원회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에서 보면 1919년 4월 18일에서 19일에 일어난 제천 송학면 만세시위가 마지막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충북지역의 만세운동은 한 달 남짓한 기간 일어난 것이 된다. 또한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집회 횟수가 44회, 인원은 25,750명으로 기록되어 있어 한 달 동안 도내 곳곳에서 만세시위와 함성이 끊이지 않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지금까지 충북지역 3·1운동에 대해 최근에 알게 된 몇 가지 이야기를 해보았다.

이러한 내용을 이미 알고 있는 분들도 있고 처음 알게 된 분들도 있을 것이다. 또한 어떤 분들은 지금 소개한 것 말고도 많은 이야기를 알 수도 있다.

요즘에는 유튜브 등 매체를 통해서도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으니 이번 삼일절에는 3·1운동에 대해 살펴보고 가족끼리 혹은 주변 지인들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며 그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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