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단상(斷想)
설날 단상(斷想)
  • 신미선 수필가
  • 승인 2021.02.09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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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신미선 수필가
신미선 수필가

 

작은 시골 동네에 오일장이 열렸다. 시절로 치면 곧 설 명절이 시작되니 오늘이 대목장인 셈이다. 오후 들어 날씨가 따뜻해지니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모처럼 장터에는 활기가 돈다.

유년시절, 설이 다가오면 내 고향 시골에도 생기가 돌았다. 산도 들도, 마을도 더할 나위 없이 고요한 동네에 모처럼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며칠 전부터 집집이 두부를 하고 마을 떡방앗간에 사람들이 북적이면 그날부터 이미 명절은 시작된 것이다.

설을 기다리며 만드는 엄마의 음식 중 가장 으뜸은 엿이었다. 이틀 가까이 사랑방 아궁이에 장작불을 때고 커다란 가마솥에 엿을 고았다. 처음엔 멥쌀과 엿기름으로 흡사 쌀뜨물처럼 멀건 물이 적당히 졸여지면 달콤한 조청이 되고 엿이 되었다. 엿이 굳기 전에 가을에 수확한 땅콩을 얹으면 땅콩엿이 되고 검은 콩을 볶아 올리면 영양 만점 콩엿이 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건 참깨를 듬뿍 얹은 고소한 깨엿이었다.

설 연휴가 시작되면 타지에 나가 있던 식구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종갓집이었던 우리 집으로 가장 먼저 작은집 식구들이 찾아왔다.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숙모는 양손 가득 집안의 가장 어른인 할머니의 내복부터 식구 수 대로 양말을 사들고 들어오셨다. 학업 때문에 집을 나가 있던 언니와 오빠도 왔다. 둥근 밥상 두 개를 펴고 온 식구가 저녁을 차려 먹고 나면 방 하나엔 남자들이, 또 다른 방 하나엔 여자들이 모여 하룻밤을 잤다.

설날 당일이면 차례상 차리기에 집안의 여자들이 총출동했다. 엄마가 가마솥에 밥을 하고 탕을 준비하면 숙모는 나물을 무쳤다. 언니는 마당에 마련된 아궁이 군불에서 김을 굽고 나는 수저와 그릇을 챙겼다. 여자들이 음식을 만들고 아버지와 숙부를 비롯한 오빠가 차례상을 차리면 비로소 방문 하나를 조용히 열고 절하기가 시작되었다. 음식을 장만하고 차례상에 올리는 시간은 며칠이었으나 절을 하고 상을 물리는 시간은 참으로 간단한 찰나였다.

아침 차례상을 치우고 나면 어른들이 계시는 집을 찾아 새해 인사를 다녔다. 우리 집에는 할머니가 계셨기에 많은 이들이 세배를 왔다. 그러면 부엌에서는 덩달아 손이 바빠졌다. 고스란히 엄마의 설날은 부엌과 안방 문턱을 오르내리느라 명절 내내 고단한 날들이었다.

지금은 할머니도 경치 좋은 선산에 누워 세배를 받는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의 세대들이 도래했으나 그의 자식들은 하나둘씩 도회지로 나가면서 동네는 빠르게 적막해졌다. 이제 더는 대문을 열어둘 일도 없어졌다. 올해는 더더욱 코로나로 인해 고향에 갈 수조차 없게 되었다.

해마다 돌아오는 명절. 떡방앗간에서 뜨끈뜨끈한 가래떡을 갓 뽑아 대야에 이고 집 대문을 들어서던 엄마의 모습이 그립다. 온종일 사랑방 아궁이에 불기운을 넣어 가마솥에서 두부를 만들고 조청을 고아 온갖 종류의 엿을 만들어내던 그 시절의 명절이 자꾸 생각난다. 엄마에겐 고단한 명절이었겠지만 온 식구가 둘러앉아 북적이던 그때가 나는 요즘 많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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