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곡성당서 만나는 조선을 사랑한 파란 눈의 임가밀로 신부
감곡성당서 만나는 조선을 사랑한 파란 눈의 임가밀로 신부
  •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 승인 2021.02.08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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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장호원은 남한강의 지류인 청미천을 사이에 두고 충북 음성 장호원과 경기도 이천 장호원으로 불렸다. 그러나 행정구역의 명칭을 정리했는데 음성 장호원을 감곡면으로, 이천 장호원을 장호원으로 했다. 이곳은 조선 시대에는 소금 배가 드나들던 남한강의 지류이며 현재 3번 국도와 영동고속도로와 중부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다. 이곳에 지금은 `매괴 성모 순례지'로 명칭이 바뀌어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충북 최초의 천주교 성지인 음성 감곡 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천주교 선교 역사상 가장 특이한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다. 세계 역사를 살펴보면 선교사들이 목숨을 걸고 다른 나라로 가서 천주교를 전파하다가 박해를 받아 순교하는 형태였다, 그런데 조선은 천주교 선교사 한명 파송된 적 없는 나라에 천주교 신자들이 저절로 생겨났다. 선교사들이 찾아온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발로 선교사를 찾아가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스스로 교회를 세운 나라이다. 그리고 교세가 확산한 후 선교사를 파송시켜 달라고 요청해 천주교의 교회가 만들어진 희한한 나라가 조선이다.

음성 감곡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성당을 세운 프랑스 신부 임가밀로는 1893년 9월 13일 명동성당에 도착했다. 처음 환영식에서 그는 자신의 한국 이름을 임가미(任加彌)로 정하고 “나는 조선 사람이 되었다”고 외쳤다고 한다.

임 신부는 성당을 건축하기로 하고 자리를 찾던 중 100여 칸이나 되는 고가를 발견했다. 그 집은 1882년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피신해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명성황후의 6촌 오빠인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이었다. 그러던 중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민응식이 서울로 압송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후 의병들이 민응식의 집을 점거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집이 불타게 되었다. 몰락한 민씨 집안과 불타버린 집은 흉물로 전락했고 임 신부는 이 집을 헐값에 매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임 신부는 이 집을 매입한 뒤 1896년 감곡 본당을 설립했고 1930년 지금의 고딕식 성당을 건립하였는데 현재 감곡성당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8호로 지정돼 있다. 1930년 임 신부는 새 사제관의 건축 계획을 수립, 공사를 시작해 1934년 완공했다. 외벽은 전부 화강석으로 마감되어 있고 지붕은 녹색 페인트칠을 한 함석지붕이다. 지붕 밑의 채광을 위해 지붕에 돌출되게 만든 창이 시원스럽게 나 있다. 구조 방식은 화강석 조직으로 기둥이 없으며 지붕에는 석조 굴뚝 3개가 있다. 이 건물은 현재 매괴박물관으로 충북 최초의 석조 건물이다.

임 신부는 1907년 일본 제국주의에 압박받는 우리 민족에게 민족의식을 심어 주기 위한 동기에서 매괴학당(현재 매괴고등학교)을 세워 민족교육의 산실이 되게 하였다. 당시 교육과정에 동국사략, 유년필독 등 역사서를 교재로 사용했다. 이 때문에 일제 통감부가 학부대신에게 제재를 가하도록 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았다. 임 신부는 학교의 전통을 뿌리내리기 위해 온갖 고통과 시련을 온몸으로 감수하면서 교육활동에 더욱 전념했다고 한다.

파란 눈의 신부가 이 땅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스스로 고난의 길을 자처하며 이 민족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면서 우리 역사에 기여한 점에서 큰 감동을 받는다. 특히 신앙과 교육을 몸소 실천한 모습에서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 지도자의 모습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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