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가는 길
나를 찾아가는 길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1.02.02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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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설날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새벽 우시장 곳곳에 별리(別離)의 콧김이 서늘합니다. 동트기 전 컴컴한 무심천 둔치의 길게 이어진 길을 걷다가 송천교를 지날 즈음엔 항상 누군가가 급한 걸음으로 나를 뒤쫓아 오는 기척을 느끼게 됩니다. 처음에는 누군가 더 빠르고 더 많은 폐활량을 위해 서두르고 있는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질 수 없다는 생각에 내 걸음도 점점 빨라져 숨이 턱에 찰 무렵 뒤돌아보면, 이미 내가 지나온 길만 비어 있는 채로 덩그러니 남아 있고 사람의 흔적은 찾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 내 뒤를 따라오고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가 돌아보니 텅 빈 길에서, 섬뜩했던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그 새벽길에서 나는 깨닫습니다.

나를 따라오는 듯한 기척은 여러 군데에서 어둠을 밀어내던 내 그림자였음을. 내가 지나온 길에 서 있던 가로등은 내 앞길에 그림자를 만들고 있고, 내가 막 지나가는 길옆의 불빛은 내 옆에 그림자를 붙여 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가고 있는 먼 길 앞에 세워져 있는 가로등은 내 뒤로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가 다가갈수록 짧아지더니, 어느 순간 사라지고 맙니다. 가로등 불빛이 있는 한 그 새벽길에 나는 언제나 여러 개의 그림자와 함께 있습니다.

세상사 혼자 살 수 없듯이, 내가 오로지 하나의 상념과 단 하나의 인연, 그리고 오로지 나 외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에고(ego)의 자연인으로만 서성거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송천교 높은 다리 위에 세워진 가로등 불빛이거나, 명멸하는 신호등, 무심천 둑길을 하염없이 비추며 길게 늘어선 가로등, 또는 쫓기듯 질주하는 자동차의 불빛에 이르기까지 그 순간 내 주변의 모든 인공의 불빛들은 나를 절대로 혼자이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방으로 나를 에워싸던 내 그림자들은 한참을 걸어 인적이 드문 정북토성 근처에 다다를 때쯤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비로소 혼자 남았다는 설렘이 두려움과 극단으로 교접하는 순간, 고개 들어 하늘을 보면 별빛이 참으로 영롱합니다. 달 밝은 겨울날, 포장도로에 내려앉은 서리가 달빛에 반사되어 흐릿하게 반짝거리는 광경, 작지만 이토록 찬란한 세상이 어둠 속에 숨어 있는데 그동안의 우리는 지극히 밝은 세상만을 욕심하고 있는 건 아닌지요. 그리고 어쩌면 나 또한 너무 많고 너무 환한 인공의 불빛에 길들여진 채 무심하게 살고 있는 건 아닌지 고개가 저절로 숙여집니다.

칼바람이 부는 새벽, 우암산 둘레길의 바람소리를 듣습니다.

솔숲을 지나고, 애잔하게 남아있는 마른 잎들을 훑어내며 참나무 숲을 빠르게 흔드는 바람소리는 멀리서 으르렁거리는 고단한 사람들의 자동차 소리와 닮았으되 또 닮지 않았습니다.

바람은 차갑지만 일정하지 않고, 그리 부담스럽지도 않습니다. 새벽잠을 쫓아내고, 뼛속까지 파고드는 칼바람도 아랑곳하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끝내 멈추지 못하는 인간이 뿜어내는 자동차의 울부짖음과는 그 근본을 달리합니다.

지상을 향해 수직으로 내려앉았던 <산불조심> 깃발이 거친 겨울바람을 맞아 수평으로 펄럭이고 있습니다. 직립의 운명에 따라 오로지 위로만 향하는 수직의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 고단한 사피엔스에게 바람은 나란한 수평의 넓은 의미를 문득문득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항상 그렇게 위로만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아래로 성장해야 한다. 위로 성장하는 것이 성공이나 경쟁을 통해서 가능한 에고의 확장이라면 아래로 성장하는 것은 내면의 깊이가 풍요로워지는 것, 즉 셀프의 심화다. 우리가 삶의 보람과 열정을 잃지 않도록 해주는 것은 바로 에고의 과도한 성장이 아니라 셀프의 비옥함이다.”(정여울, `내 성장의 비밀: 비난에 대처하는 용기'매거진 `G') 작가의 말처럼 새벽길을 걷는 내 발바닥 아래의 심연을 생각합니다.

오늘 입춘입니다. 아련했던 뿌리들은 서서히 깊은 물을 끌어올리겠지요. 다시 시작하며 깊어지는 법을 깨우쳐야 하는 계절입니다. 그 길에서 나에게 묻습니다. 나는 무엇이고 또 우리는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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