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관행은 지뢰가 된다
이런 관행은 지뢰가 된다
  • 권혁두 기자
  • 승인 2021.01.17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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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국회의원의 어린 딸이 납치됐다. 수사에 나선 경찰이 이틀 후 유력한 용의자를 체포한다. 자신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여러 증거에도 불구하고 용의자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납치된 소녀가 고립된 공간에 갇혀있다면 구출에 촌각을 다퉈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다. 소녀를 살릴 골든 타임이 속절 없이 흘러가자 경찰은 의원에게 제안한다. 용의자의 입을 열려면 고문을 할 수 밖에 없으니 눈을 감아줄 수 있겠느냐고. 의원은 사회적 약자의 인권, 특히 재소자나 피의자가 겪는 부당한 처우에 주목하고 문제를 제기해온 진보 정치인이다.

그러나 딸의 생사 앞에서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고문에 일가견이 있는 형사가 취조실에 투입돼 용의자의 자백을 받아내고 소녀는 구출돼 의원의 품에 안긴다. 10여년 전 방영됐던 미국 TV 드라마 `더 쉴드'의 한 대목이다. 주인공인 악덕 형사 빅 매키가 범인을 고문해 사건을 해결한 후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의원을 바라보는 장면이 미묘한 여운을 남겼다. 반대로 의원은 딸을 되찾은 안도감과 반인권 범죄에 공모해버린 열패감이 뒤섞인 묘한 표정으로 형사를 쳐다본다.

두 사람의 표정이 교차하는 장면은 드라마 밖으로도 질문을 던졌다. 선량한 피해자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가해자를 고문해도 되는가? 불법은 어떤 경우에도 허용돼서는 안되는 것인가? 결과가 정의로우면 과정은 상관이 없는 건가? 정의로운 불법이 존재하긴 하는 건가?

국내에도 지금 비슷한 논란이 일고있다. 지난 2019년 3월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이 태국으로 출국하려다 공항에서 저지됐다. 그는 별장에서 성접대를 받은 혐의 등으로 재수사를 앞두고 있었다. 탑승 게이트 앞에서 출국 금지를 통보받고 돌아가는 김 전 차관의 모습에 시민들은 환호했다. 그가 받은 혐의 자체가 파렴치한 데다 검찰이 앞서 두 차례나 수사하고도 무혐의 처분해 제식구 감싸기 의혹이 잔뜩 불거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시 김 전 차관에 대한 출금 조치가 부당했다는 의혹이 최근 제기됐다. 법무부가 그의 출국정보를 무단 조회하고 대검 과거사진상조사단에 소속된 검사가 가짜 사건번호를 사용해 출금 조치를 했다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명백한 위법 행위이다. 더욱이 출금 신청은 수사기구가 아니라 수사기관만 할 수 있다.

당시 김 전 차관은 국민적 공분을 살 정도로 추악한 범죄 혐의를 받고 있었다. 그가 해외로 도피하면 어렵게 성사된 재수사도 무산될 상황이었다. 그의 출국을 막았어야 한다는 당위에 이견이 들어설 여지는 없다. 그러나 그의 발을 묶기 위해 사회가 합의한 법적 절차까지 훼손하는 것이 옳으냐는 의문이 남는다. 지금 빚어지는 논란의 핵심이다.

법 집행 과정에서 변칙을 허용하는 관행을 만드는 것은 미래에 터질지도 모를 지뢰를 심는 짓이다. 아무리 목적이 좋더라도 말이다. 더욱이 시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조치가 급박하다는 이유로 임의로 처리되고 묵인된다면 후유증은 심각할 수 있다. 그 관례가 언젠가 권력 남용의 구실로 악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을 누가 하겠는가? 납치됐던 딸을 찾고도 의원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것은 자신이 동의한 고문이 무고한 시민을 범죄자로 만들 폐습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권력의 의지가 늘 선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신가? 그렇지 않다면 잠시 정의를 유보하더라도 당장의 변칙보다 법과 제도를 보완하는 원칙의 길을 지지하는 것이 옳다. 김 전 차관은 뇌물죄가 인정돼 2년 6개월 형을 받았지만 성접대 혐의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지나 재판도 받지않았다. 그에게만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말자고 할 수는 없듯이 말이다.

대검이 과거사조사단의 김 전 차관 출금 요청을 거부했기 때문에 조사단이 무리수를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는 지적도 있다. 일리가 있지만 대검이 출금 요청을 거부한 사유와 책임은 따로 따질 일이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수사기관의 요청이 없더라도 법무장관이 직권으로 출국금지를 할 수 있다”며 절차적 문제를 부정했다. 장관의 그런 직권이 어느 법문에, 어느 법리에 있는 지 추 장관이 밝혀내면 이번 논란은 바로 종식된다. 그걸 못하면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고 국민이 납득할 입장을 내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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