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용기 배신하는 시스템
시민의 용기 배신하는 시스템
  • 권혁두 기자
  • 승인 2021.01.10 18: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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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2013년 5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8살 어린이 게이브리얼 페르난데스가 숨졌다. 의식을 잃은 상태로 병원에 실려왔을 때 그의 몸은 멍과 담뱃불로 지진 상처투성이였다. 부검에서는 두개골 함몰과 BB탄을 쏘아 생긴 상처, 갈비뼈 여러대가 골절된 흔적이 발견됐다. 범인은 아이의 엄마와 동거남이었다. 두 사람은 외할아버지 집에서 자라던 아이를 데려와 8개월 동안 상습적으로 폭행과 고문을 가했다. 미국 전역이 충격과 자책에 빠졌다. 장기간 계속된 이 잔혹한 범죄를 왜 아동보호 시스템이 인지하고 대처하지 못했느냐는 사회적 책임론이 대두됐다.

수사에 착수한 검찰은 엄마와 동거남을 1급 살인죄로 기소했다. 게이브리얼을 담당했던 사회복지사 4명은 즉각 해고됐고 공범으로 기소됐다. 미국에서 아동학대 범죄로 담당 공무원이 기소된 첫 사례였다. 상처투성이로 등교하는 게이브리얼을 본 담임교사가 수차례 신고했으나 그들은 보호자만 만나 거짓말만 듣고 돌아갔다. 현장에 출동하고도 덩치 큰 아이와 싸우다 맞았다는 보호자의 말만 듣고 조사를 종결한 경찰도 수사를 받았다.

바로 그 해 한국 울산에서도 8살 아이 서현이가 의붓엄마에게 맞아 숨졌다. 계모는 딸을 3년간 일삼아 폭행했다. 죽던 날 서현이는 1시간 동안 폭행을 당해 갈비뼈 16대가 부러진 상태로 발견됐다. 나라 전체가 들끓었고 정부와 정치권은 재발을 막겠다며 법석을 떨었다. 달라지기는 했다. 이후 학대받는 어린이들이 처한 현실이 더 악화됐으니까. 학대와 폭행으로 사망한 아동이 2014년 14명에서 계속 늘어나 지난해는 42명으로 역대 최다라는 치욕적인 기록을 세웠다. 아동학대 신고도 급증해 학대 판정을 받은 아동이 2014년 1만27명에서 지난해 3만45명으로 3배나 늘었다.

정인이의 참혹한 죽음은 예정된 비극이었던 셈이다. 아이에게 가해진 폭행이 워낙 끔찍해 국민적 분노를 자아내고 있지만, 지난해 40여명의 정인이가 죽고 3만명 넘는 아이가 가정에서 학대받고 있음을 확인한 통계가 우리가 마주해야 할 진실이다. 정인이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게이브리얼 사건과 유사하다. 어린이집 원장과 이웃의 신고는 3번이나 경찰에서 멈춰 버렸다. 입양기관과 아동보호기관도 정인이가 겪던 고통을 피해가기에 바빴다. 그들은 아이의 상처를 확인하고도 양부모의 진술만 듣고 덮어버렸다. 폭력을 막을 힘도 주변에 도움을 청하거나 항변할 능력도 없는 무력한 존재의 피해가 접수됐으나 가해자의 주장에만 귀를 기울였다.

범행은 한결같이 끔찍했지만 처벌은 관대했다. 지난해 법원이 재판한 15건의 아동학대 사망사건은 모두 과실을 인정한 치사죄가 적용됐다. 그것도 최고형인 15년 형을 받은 사건은 1건에 불과했고 5년 미만이 5건, 집행유예로 풀어준 사건도 2건이나 됐다. 법원은 세살 아들을 때려 숨지게 한 아버지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며 “평생 고통과 죄책감 속에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라고 동정했다.

처벌이 능사는 아니라고 하지만 천륜을 저버린 악행에 경종을 울릴 정도는 돼야 한다.

로스앤젤레스 법정의 배심원들은 검찰이 게이브리얼을 살해한 두 사람에게 적용한 1급 살인을 유죄로 판정했다. 1급 살인의 요건인 사전모의와 동기, 고의성이 모두 입증됐다고 봤다. 또 폭행을 주도한 남성에게는 사형, 엄마에게는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을 판결했다. 공범으로 기소된 공무원들은 나중에 기소가 기각됐지만 4년간 재판을 받으며 여론의 질타를 받아야 했다.

국회가 그동안 미루던 40여건의 아동보호 관련법을 일괄 처리하겠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하나의 룰만 바로 세워주길 바란다. 의심되는 아이가 신고되면 즉각 부모와 격리시킨 후 상담과 아동학대 전문의의 검사를 받도록 하는 것이다. 아동보호기관이 방문하더라도 부모가 거부하면 아이를 만나지 못하는 지금의 규정을 크게 강화해야 한다는 얘기다. 효과를 거두려면 경찰이 동행해 영장을 집행하는 방식으로 개선돼야 한다. 아동학대 사망사건의 대부분은 이 초동단계의 고장에서 출발한다. 시민의 용기를 허술한 시스템이 무위로 돌리는 답답한 관행이 이번에는 근절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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