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을 마무리하는 방법
2020년을 마무리하는 방법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20.12.29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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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책상 위 달력 12월 면에는 아쉬움의 메모가 빼곡하다. 미뤄두었던 건강검진 날짜며 방과후수업 보강 날짜, 늦어진 문집발간과 정산, 실적 보고, 원고 마감일, 무산된 연말 모임들까지 일정들로 꽉 차 있다. 나는 해마다 이런 탁상 달력을 들춰 보며 한 해를 마무리하곤 한다. 1월부터 한 장씩 넘겨 가며 기록들을 따라가다 보면 지나온 일 년이 한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평범한 모든 일상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코로나19를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을 듯하다. 계속되는 비상시국은 기본적인 인간관계마저 흔들어 꼭 필요한 만남조차 망설이게 했다. 지난주에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얘, 나 꼬막이 먹고 싶다.” TV에서 제철 음식으로 꼬막을 소개하는 것을 보셨단다. 그런데 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은 사회적 거리 두기 2.5단계로 5인 이상 가족 모임도 제한하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도 모르지 않을 텐데 이렇게 전화까지 했을 땐 이유가 있겠지. 조심하자고 더 중요한 것을 잃을 순 없기에 다녀오기로 했다.

다음날, 때마침 남편의 지인이 벌교 고향 집에 내려가 있었기에 바로 싱싱한 꼬막을 구할 수가 있었다. 손질법과 가장 맛있게 삶는 비법까지 배워서 저녁에 시댁으로 갔다. 비법대로 남편이 직접 꼬막을 삶았는데, 거품이 부르르 끓어오르고 한두 개 입을 벌리기 시작하자 불을 끄고 꼬막을 건져내는 것이었다. 덜 익은 것 같기도 하고 입 다문 조개를 어떻게 까서 먹겠다는 건지 차라리 내가 할 걸 그랬나 잠깐 후회했었다. 그런데 남편이 껍질이 맞붙어있는 홈 쪽에 숟가락을 끼우고 비틀자 딸깍하고 쉽게 분리되면서 그 안에 육즙 가득 탱탱한 꼬막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까는 재미도 있고 바다향이 살아있는 꼬막 살이 어찌나 맛있던지 어머니는 물론 남편과 나, 아들까지 배가 터지도록 까먹었다. 뒤로 나앉은 다음에야 상 위로 수북하게 생겨난 조개껍데기 산이 보였다.

친정엄마 역시 경로당에도 못 나가고 집에만 계실 텐데, 아버지 돌아가신 뒤로는 읍내 시장 보러 나가는 일도 어려워 볼일 있을 때마다 동생이 내려와 모시고 다녔었다. 요즘은 서울에 확진자가 많아져 동생도 통 내려오질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전화를 걸었다. 밀가루며 우유, 사과 등 식료품이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는 아무래도 뵙고 와야 할 것 같아 방과후수업이 종강하는 다음 주에 한번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고맙게도 남편이 그 날짜에 맞춰 또 꼬막을 주문해 주었고, 그렇게 엊그제 친정에 가서 또 하나의 꼬막 산을 만들고 돌아왔다. 별미라며 달게 잡숫는 모습에 무슨 큰 효도라도 한 듯 뿌듯했었다.

흔히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들 한다. 비상상황이 길어지면서 관계가 조금씩 소원해지는 경향이 없지 않은 듯하다. 안 만나는 것만 능사는 아닐 터, 개개인이 방역 수칙을 잘 지킨다면 얼마든지 관심과 사랑을 함께 나누는 따뜻한 연말연시가 될 수 있다. 내 경우에도 만나기 위해 오히려 더 조심하고 철저히 관리했던 것 같다.

부표처럼 떠다니는 불안한 날들을 허투루 흘리지 않고 노력한 흔적이 달력 안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 와중에 큰딸 혼사도 잘 치렀고, 챙겨야 할 건 챙겨가며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지 싶다. 이 힘든 시절을 함께 별 탈 없이 지나고 있는 지인들, 가족, 특히 두 분 어머니께 감사드리며 2020년은 이렇게 마무리해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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