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노마드의 탈영토화
호모 노마드의 탈영토화
  • 이영숙 시인
  • 승인 2020.12.20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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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이영숙 시인
이영숙 시인

 

오래전 질 들뢰즈의 명저 『천개의 고원』을 만났을 때 받았던 충격은 매우 컸다. 인간종과 이성이 만들어낸 문명과 과학에 대한 의식의 피라미드가 무너지는 계기였기 때문이다. 제목만으로도 유추하듯이 `천개의 고원'은 천개의 면을 가진 보석이라는 의미로 중심을 두지 않고 각 존재를 그대로 바라보는 다양성의 시점이다. 나무, 뿌리 중심으로 서열화하는 서양식 대칭구조방식인 나무 해독 구조를 해체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을 띤다.

들뢰즈에 의해 일반화한 리좀(Rhizome)은 번역하면 잔뿌리를 의미한다. 그렇다고 잔뿌리라는 것이 상위개념인 큰 뿌리에 빗댄 개념이 아니고 각기 객체가 되기도 하는 독립적인 존재를 말한다. 모더니즘 시대의 위계 구조를 해체한 개념이 바로 잔디적 사고인 리좀 구조인 것이다.

그런 사상이 오래전부터 주맥으로 자리 잡은 가운데 경북인성인문학 교육연구소에서 발간한 『인문학적 관점에서 본, 다문화 사회의 이해』는 그동안의 사상을 정리해준 최종 요약본 성격이라서 나름대로 의미 있는 독서 시간이었다.

한때 독일은 미국에서 사용되는 우생학 수단을 모델로 삼아 독일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것들 위에 존재한다는 독설을 내세웠다. 그런 바탕에서 출발한 폭압이 `결함 혈통 방지법'제정이었고 인종부적합자 척결이라는 명분의 인종청소였다.

서유럽 제국주의 중심으로 편성된 우열구조와 서구중심으로 제작한 지능검사의 실체를 보면서 인간 종이 지닌 태생적 기질을 떠올린다. 왜 철학이 그리스로부터 태동하고 왜 인문학이 사업을 하는 기업가들의 요청으로 촉발되었는지 들여다보면서 철학의 바탕이 다양성에 있음을 자각한다. 그 길엔 사상적 노마디즘(Nomadism) 정신이 필요하다. 호모 노마드는 `이동하는 인간'을 의미한다. 유목하는 인간의 초점은 정착하지 않고 집시처럼 늘 흐르는 인간을 말한다. 그러나 그 유목이라는 의미의 상징성은 단지 물리적 공간에만 머물지 않는다. 바람에 묶이지 않고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이라면 욕망을 삶의 주춧돌로 세우진 않을 것이다. 거기엔 창조와 융합, 통섭이라는 확산적 사고가 자유롭게 존재하는 까닭이다.

버려진 황무지를 새로운 생산의 땅으로 일궈가는 것, 한자리에 머물더라도 어떤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붙잡히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재창조하는 삶이 호모 노마드적 삶이다.

숲이 아름다운 것은 한해살이풀, 여러해살이풀, 관목, 양수림, 음수림 등이 혼효림을 이루기 때문에 조화로운 것이다. 다만 산림전문가와 자본경제학자의 시선에 따라 다르게 평가될 뿐이다. 중심은 서열이라는 위계 구조를 만든다. 그래서 모더니즘 시대의 대칭적 구조는 많은 폭력과 희생자를 낳았다. 나무는 나무대로, 곤충은 곤충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서로 비대칭 구도로 나아갈 때 천 개의 보물들이 각자의 고원을 이루며 건강한 층을 형성한다. 지금껏 야생을 찬탈하고 문명이 만들어낸 구조엔 거친 야만적 근성만 즐비하다.

이제 기존의 가치관이 정립한 불평등한 체계를 인식하는 데서 진일보하여 탈영토화 탈구조화가 필요하고 각자 이 세상에 새로운 초석과 출발점을 제시하는 창조자로 거듭나야 한다.

`유약한 영혼은 세계 안의 한 곳에 자신의 사랑을 고정하지만, 강한 사람은 그의 사랑을 모든 곳에서 확장(빅토르 위고)'하기 때문이다. 한 영토에 묶이지 않고 자유로운 삶, 사상이 강인한 자아, 그 자유로운 영혼이 부르는 초원의 노래는 그대로 기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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