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와 이육사
헤밍웨이와 이육사
  • 반영호 시인
  • 승인 2020.12.17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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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論
반영호 시인
반영호 시인

 

고위공직자의 직무 관련 부정부패를 수사·기소하는 독립기관. 약칭은 `공수처'이다. 1998년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권력형 부패범죄 처벌을 위해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를 신설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래, 2002년 노무현 대통령, 2016년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공약으로 제시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신설에 대한 법안이 10일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되었다. 권력형 비리나 수사기관 종사자들이 연루된 범죄는 특별검사제도를 통해 수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별검사제도는 수사 과정에서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기존 검사가 아닌 특별검사를 임명해 수사·기소하게 하는 제도다. 그러나 특별검사제도는 한시적으로 진행되는 만큼, 수사에 한계가 있다는 비판이 있었으며 이에 따라 특검제도를 상설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공수처는 특검이 맡았던 역할을 상시적으로 수행하는 기관으로, 특검제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평가받는다.

내가 세상물정 몰랐던 어릴 적엔 경찰이 제일 무서운 곳으로 알았다. 순사가 온다 하면 울던 아이도 그쳤다고들 했었다. 일제 때부터 이승만 정부 시절 민중을 억압하던 대표적 국가 권력기관은 경찰이었다. 그 후 내가 막 초등학교에 들어갈 즈음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 이후 최고 권력 집단은 군으로 바뀌었다. 또 군사정부 시절 중앙정보부는 대통령 다음가는 권력으로 군림했다. 그때 아랫집 아재와 대고모네 아재도 끗발 좋다는 중앙정보부에 들어가 집안에서 큰 잔치를 벌였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경찰도, 군도, 정보기관도 더는 힘을 쓸 수 없었다. 법치의 시대가 도래했던 것이다. 이때 불법적 폭력을 일삼던 과거의 권력기관을 대체한 것이 검찰이었다. 검찰은 법률이란 합법적 수단을 썼고, 사법시험을 통과한 엘리트로 구성돼 있었다. 게다가 기소권과 수사권을 독점한 강력한 권력이었다.

검찰은 군사독재 정부의 대통령들을 처벌함으로써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문민정부의 대통령과 그 가족, 측근들도 그 칼날을 피하기 어려웠다. 대기업 총수들도 검찰 앞에서는 기를 펴지 못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곧 검찰의 과잉 수사와 표적 수사가 횡행했고, 권력의 감시자에서 권력 그 자체로 변질됐다.

처음으로 검찰개혁 깃발을 든 것은 노무현 정부였다. 그러나 검찰을 집권자의 손아귀에서 풀어주는 개혁은 실패했고 노대통령 자신이 그 희생물이 됐다. 검찰개혁 깃발을 다시 든 것은 지금의 정부다. 검-경 수사권 조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등의 방법으로 검찰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정권 초기 검찰을 통한 적폐 청산 수사, 윤석열 검찰총장 임명 등 치명적 실수로 인해 검찰개혁은 다시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검찰개혁은 되살아날 수 있을까.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는 권위주의적이고 폭력적인 국가 권력기관과의 투쟁 역사가 아닌가 싶다. 이번에 공수처가 만들어지면서 또 어떤 권력기관이 될까.

이런 중에 윤석열 검찰총장이 2개월 정직을 맞았다. 윤석열 총장은 자신의 카카오톡 메시지에 Be calm and Strong이라 적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대사다. “침착하고 강하게” 이 말이 겨냥하는 것은 불법과 불의를 물리치겠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또한 “꺾일 수 없는 단단함으로”. 이육사의 `절정'을 인용한 추미애 법무부장관이 자신의 SNS에 검찰개혁에 대한 의지를 강조했다. 어찌 보면 이육사의 글이 윤총장에게 어울릴 듯도 한 글인데, 어찌 됐든 문학의 대가들이 등장했다는 점에서 한 줄 글을 쓸 때도 신중히 처리해야겠다는 다짐을 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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