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고 사는 남자
맞고 사는 남자
  •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20.12.16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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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룡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교수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교수

 

나는 집사람에게 가끔 맞는다. 이유가 있으니까 때린다고? 이유야 있지만 그게 꼭 때릴 일일까? 어느 날인가 아침에 눈을 뜨니 집사람 얼굴이 눈앞에 크게 보인다. 그래서 얼굴 돌리라고 했다. 좀 잔인한가? 때린다. 폭력적이다.

식탁에 앉아서 귤을 까먹는다. 껍질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데, 휴지통까지 가기가 귀찮다. 거실 바닥에 던진다. 너무 심한가? 또 때린다. 침대에 누워 티브이를 보는데 졸린다. 불을 끄려면 일어나야 한다. 귀찮다. 이 여사! 왜 불러!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는다. 집사람이 궁금해서 방문 열고 들어온다. 왜? 불 좀 꺼. 이 영감탱이가 하면서 때린다. 집사람이 미용실에 갔다 왔다. 머리를 잘못했다고 투덜대면서 `내가 오늘 좀 이상하지 않아?'라고 묻는다. 원래 이상해. 너무 사실적인가? 원판이 이상하다고 하는 것보다 순화된 표현 아닌가? 바른 말인데, 또 때린다.

난 요리를 좋아하는 편이다. 맛있게도 하지만 즐겨하기도 한다. 오늘은 엄마가 실력 발휘해볼게. 아이들이 말린다. 어마마마는 편히 쉬시고 아버님을 부리소서. 재료 망가지기 전에 빨리 움직이라고 아이들이 내 등을 떠민다. 실력 발휘한다. 모두 맛있게 먹는다. 내가 먹어도 맛있다.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 한마디 한다. 아이들이 당신 쉬라고 한 건 재료가 아까워서 그런 거야. 아이들에게 물으니 자기들은 전혀 그런 얘기 한 적 없다고 오리발을 내민다. 표리부동인가, 배신인가? 나는 또 맞는다.

어떤 때는 소파에 누워 티브이를 보고 있노라면 지나가다가 발꿈치로 허벅지를 찍고 간다. 불합리하다. 장난삼아 친다고 하지만 무지하게 아프다. 맞는 거도 한두 번이지. 한 번은 `일루와 봐!'하면서 위협을 했더니 순식간에 `얘들아, 아버님이 엄마를 때리려고 하는구나!'라고 외친다. 아이들이 나서서 `그건 아니지요~' 하면서 가로막는다. 엄마의 폭력성을 호소하면, 아버지가 맞는 건 괜찮은데 엄마를 때리는 건 아니지요. 남녀가 불평등하다.

젊은 시절 일이다. 간밤에 술을 엄청 먹고 와서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온몸이 쑤신다. 어제 술을 먹고 또 어디 가서 해갈을 치고 다녔나 하면서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집사람이 손을 좀 봤단다. 술 먹고 들어와 치근대길래 달래서 재우고 나니 꼴이 보기 싫더란다. 그래서 자는 인간에게 화풀이를 좀 심하게 했는데도 움찔움찔하면서 잘만 자더란다.

인간이 맞으면 달라지는 걸 그때 느꼈단다. 전에는 술만 먹고 오면 치근댔는데 그 이후로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아주 얌전하게 자더란다. 저 인간은 볶아서는 효력이 없고 때려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저 인간은 때리면 정신을 차리는 게 아니고 몸을 차리는구나. 말로야 백날 뭔 이야기를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그만이다. 행동이 고쳐지면 그것만큼 좋은 게 어디 있겠나? 그래서 말로 하지 않고 때린단다. 덕분에 나는 맞고 사는 남자가 됐다.

앞에 나오는 형용사들을 모아보자. 사실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말하는 걸 보면 잔인하다. 그걸 듣고 때리는 건 폭력적이다. 게으르고 무질서하며, 불합리하다. 아이들은 앞에서 한 말을 금세 뒤집는다. 배신인가, 표리부동인가? 또 남녀가 불평등하다. 세상 살면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여기 다 있다. 때려서 고치는 게 현대 사회에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이 정도면 해체하는 게 맞지 않을까? 그래도 해체되지 않고 나만 빼고는 다 제 몫을 하면서 산다. 그래서 가정인가? 사회가 우리 가정 같으면 난리가 나겠지?

난 요새 가출(出家)해서 안 맞고 산다. 산에서 살아보니 정신 차리는 건 백날 해봐야 소용이 없다. 머리로 아는 건 오히려 해악이다. 몸을 차려야 한다. 안 맞고 몸을 차리는 게 이렇게 힘든 건지 정말 몰랐다.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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