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은 벌(罰)에 대한 경험”
“양심은 벌(罰)에 대한 경험”
  • 김진균 청주중학교 교장
  • 승인 2020.12.15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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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김진균 청주중학교 교장
김진균 청주중학교 교장

 

우리는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자신들의 자녀와 학생들에게서 문제 행동이 발견되면 벌을 준다. 물론 여기서의 벌은 비난이나 책망하는 말 혹은 어떤 일정한 장소에 가 있으라고 명령하는 체벌 등을 모두 포함한다. 벌은 자동차에 비유하면 달리는 자동차의 브레이크와 같은 역할을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자동차를 가리키며 하나는 엑셀만 있고, 다른 하나는 브레이크만 있다고 하면서 어떤 차를 타겠냐고 하면 우리는 엑셀만 있는 차보다는 브레이크만 있는 차를 탈 것이다. 브레이크만 있는 차는 달릴 수는 없어도 위험하진 않지만 엑셀만 있는 차는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벌은 우리의 삶에 그리고 자녀와 학생들의 교육에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교육 방법 중의 하나이다. 만약 부모나 교사가 자녀와 학생들에게 벌을 주지 않는다면 그 자녀와 학생들은 제대로 삶을 살아가기 어려울 것이다. 엑셀만 있는 자동차처럼 질주는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필요할 때 멈출 수 없기 때문에 너무도 위험한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즉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벌의 부정적 의미 때문에 벌을 있는 그대로 보려 하지 않고 눈을 감아버린다.

벌은 분명 학생 지도와 자녀교육에 필요하다. 그렇다면 벌이 왜 필요한지 그 근본에서 다시 생각해 보자. 우리가 벌을 주는 목적은 더이상 올바른 가치에 반해서 행동하지 못하도록 하며, 올바른 가치를 경멸하지 못하도록 하고자 하는 데에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목적이 달성되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필요한데, 그것은 벌을 받는 사람이 합리적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벌은 단순히 행위를 억제하기 위해서만 사용하는 되는 것이 아니고, 벌이라는 수단을 통해 도덕적 가치를 내면화시킴으로써 행위를 억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비합리적인 사람이나 동물에게 벌을 줄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비합리적인 사람은 자신의 공격이 벌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결코 벌의 정당성을 이해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물이나 비합리적인 인간이 단지 그들의 행위를 억제하고 있다고 해서 그들이 벌을 받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벌을 통해 행위를 억제하는 사람에게 벌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벌을 받고 있는 사람이 그 벌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한다. 즉 벌을 받는 사람이 자신이 받는 벌이 받을 만 하다고 인정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벌은 그들에게 단순히 응분이거나 분풀이로 인식될 뿐이다. 게다가 벌은 벌을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도덕적 갈등과 반성을 이끌어 낼 수 있어야만 한다. 벌이 반성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에게 단지 고통이나 불쾌 경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벌은 새로운 도덕적 동기에 의해 미래의 비행으로부터 효과적으로 방향을 바꿀 수도 있어야만 한다.

이처럼 벌은 교육적 의미를 지닌 교육의 한 방법이다. 다만 벌의 전제 조건인 합리성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자녀와 학생들에게 벌을 줄 때 그냥 비난하거나 책망만 하는 것이 아니라 벌을 받는 사람이 그 벌을 정당하다고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화가나서 주는 벌은 분풀이일 뿐이고 자녀와 학생들을 불쾌하게 하거나 고통만 안겨주는 행동이지 교육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나 학생이 올바르게 성장하길 바란다면 벌을 주는 것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프로이트는 양심을 벌에 대한 경험이라고 하였다. 우리의 자녀와 학생이 양심을 지닌 사람으로 성장하길 기대한다면 벌에 대한 우리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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