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주사에서 만나는 벽암대사의 나라사랑 정신
법주사에서 만나는 벽암대사의 나라사랑 정신
  •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 승인 2020.11.30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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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1500년의 세월을 국가와 민족의 든든한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감당한 법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사찰이다. 법주사 정문 앞에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 법주사 벽암대사비가 지금도 법주사를 지키듯 우뚝 서 있다. 이 비는 조선 현종 5년(1664)에 건립된 비석으로 글씨는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 이오가 썼다. 규모는 높이 2.13m, 폭 1.1m, 두께 35㎝이다.

벽암대사(碧岩大師 1575~1660)는 보은 출신으로 10세에 출가하여 설묵의 제자가 되었으며, 14세에 보정과 그 후 선수의 제자가 되어 스승을 따라 속리산, 덕유산, 가야산, 금강산 등에서 수도 정진하였다. 대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분연히 일어나 승병으로 해전에 참여하여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 공적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런데 1612년(광해군 4) 엉뚱한 사건에 연루되어 옥에 갇혔다. 그러나 광해군이 직접 치죄하다가 벽암대사의 인품과 덕성에 감복하여 오히려 하사품을 내리고 방면한 일화는 유명한 사건이었다. 이때 함께 투옥되었던 부휴를 대불이라 부르고 벽암을 소불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광해군은 벽암대사를 봉은사에 머물게 하고 ‘판선교도총섭’의 직함을 내렸지만 1615년(광해군 7)에 지리산 칠불암으로 가서 수도에 정진하였다. 1616년 다시 신흥사로 옮겼으나 700명의 대중이 모여 오자 밤중에 태백산 전천동으로 은거하였다.

1617년에 광해군이 청계사에서 큰 재를 열었을 때 설법을 하였으며, 1624년 조정에서 남한산성을 쌓을 때 ‘팔도도총섭’으로 임명되어 승군을 이끌고 3년 만에 성을 완성시켰다. 이에 인조는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의 직함과 함께 의발(衣鉢)을 하사하며 대사의 공적을 치하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인조임금이 남한산성으로 옮겨가자 전국 사찰에 ‘총궐기하여 오랑캐를 쳐부수자’는 격문을 보냈다. 승군 3,000명이 모이자 이를 항마군이라 이름 짓고, 호남의 관군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향하였으나 가는 도중에 전쟁이 끝나 항마군을 해산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1641년(인조 19) 해인사에 머물 때 조정에서는 벽암대사를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하고자 하였으나 서울로 향하던 도중 병으로 갈 수 없게 되자 백운산 상선암에 머물렀다. 다음해 봉림대군에게 화엄종지를 가르쳤고, 1646년(인조 24) 가을 속리산 법주사에서 동문인 희언과 은거하였고, 희언이 화엄사로 가서 입적하자 자신도 화엄사로 가서 지내다가 제자들에게 ‘도업에 힘써 국은에 보답할 것’과 ‘사후에 비를 세우지 말 것’을 유언한 뒤 86세의 나이에 입적하였다.

지행일치와 애국애족의 정신을 알고 싶은 사람은 벽암대사의 삶을 통해 배우면 된다. 인조 때 남한산성을 쌓을 때 8도 도총섭이 되어 승려들을 거느리고 축성작업을 감독하였고, 병자호란 때에는 남도지방의 승병을 모집하여 남한산성의 인조 임금을 구하기 위해 북진한 호국과 애민정신의 화신이 바로 벽암대사다.

평생을 나라와 민족과 백성의 안위를 위해 기도하고 실천하신 큰 어른 벽암대사가 자꾸만 생각나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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