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치지 않는 여름
지치지 않는 여름
  • 김기자 수필가
  • 승인 2020.11.04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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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기자 수필가
김기자 수필가

 

뇌리 속에 여름은 항상 바쁜 걸음으로 기억된다. 누가 뒤에서 쫓기라도 하듯 정신없이 영역을 넓히면서 뛰는 모습이었다. 그런 여름의 얼굴을 끌어당기며 쓰다듬어준다. 뜨겁고 무더워야만 익어 갈 수 있었던 그동안의 과정을 보답해 주는 순간이다. 함께 손을 맞잡아 본다. 걸 거칠었던 호흡이 조용하게 낮아지면서 이제는 느긋한 표정들이다. 들리는 것뿐 아니라 온 사방에 보이는 것까지 지나온 여름의 흔적들을 숭고하게 여기며 마무리하고 있다. 그 풍경 속에 지금껏 고단했던 나의 일상을 기대어 놓는다.

모처럼의 여행은 마음을 들뜨게 한다. 차창에 기대어 떠나가는 여름을 바라보는 것도 한편의 화폭과 마주 서는 기분이다. 짙푸른 녹색 옷을 서서히 걷으며 드러내는 여름의 속살에서 가을향기에 한껏 젖어들어 갔다고나 할까. 잠깐 스치는 풍경일지라도 진한 여운이 되어 가슴을 두드린다. 한 뼘만큼의 허락된 여유, 그러나 그 안에는 풍만한 기쁨과 감사가 따르고 있다. 헤픈 상념이라 해도 개의치 않는다. 피부로 닿는 자연의 순리를 즐기는 동안 나만의 세계가 확장되어 간다는 사실에 흡족할 뿐이다.

생의 여름은 자아를 걸 위한 효과적인 마당이다. 인내가 필요하고 볕을 가르며 나눌 줄 아는 공존의 현장이라 말하고 싶다. 문득 지난날들이 떠올라서다. 어느덧 세대를 거슬러 올라 마음의 여유가 더해진 탓인지는 몰라도 차창으로 스쳐가는 풍경들이 내가 살아온 날들처럼 빠르게만 보인다. 여름의 끝자락이 보여주는 의미가 유독 깊게 다가오기에 그렇다. 지독한 태양과 습했던 기온을 거친 후에야 모든 것이 익어가듯, 인생의 가을도 그런 모습과 같았다.

가을의 문턱에 앉아 걸어온 날들을 돌아본다. 정말 바쁘고 가파르게 살아왔다. 남들과 달리 유독 여유가 없었을 만큼 아쉬운 부분도 많았었다. 그래도 시간은 나를 가을 속으로 지체 않고 데려다 주었다. 짙푸르던 여름을 보내고 오색 찬연히 열리는 가을의 문 앞에 서게 된 것이다. 거듭 순환되는 계절의 이치를 깨달으며 마음을 추스른다. 되돌아보니 분주하게 보냈던 여름 때문에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있지 않았을까.

떠나가는 여름이 나를 보며 활짝 웃는 듯하다. 무언의 위로를 전해오고 있다. 그 안에 가정이란 울타리가 선명하게 자리를 넓혀가고 있었다. 인생의 결실이라 할 만큼 호칭도 할머니란 이름 하나가 더해졌다. 한편 아직도 삶의 현장에서 뛰어야만 하는 나 자신이 중요한 사람으로 보였다. 바로 그 마음이 잠재해 있던 여름의 의지였다. 바람 불고 차가운 계절이 밀려올지라도 바빴던 여름처럼 땀 흘리며 살아가겠노라는 자신과의 새로운 약속이었다.

때로 삶의 테두리가 마음을 옭는다 해도 여름을 떠올리리라. 수고하고 땀 흘리는 인생의 여름이 없다면 어찌 이런 가을의 풍요를 맛보게 될 수 있을까. 계절은 가고 오고 반복되지만 내 삶은 한 번뿐이라는 것을 안다. 한 번의 기회를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언제나 여름은 내 안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삶의 용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차 창밖으로 지치지 않은 여름이 함께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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