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명예 부질없어 … 가족 화목하니 더 없이 행복”
“돈·명예 부질없어 … 가족 화목하니 더 없이 행복”
  • 오영근 기자
  • 승인 2020.11.01 19: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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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인터뷰/ 어떻게 지내십니까-한현구 전 충북도의회 의장
충북 향토기업 한림농원 IMF때 부도후 쫓기듯 상경
독일 전문가와 인연 … 친환경하천사업 도입 큰 관심
부도 직전 일화 꺼내며 주체할 수 없는 눈물 흘리기도
6년전 대모산서 척추 골절상 … 3년 가량 누워서 지내
기적적 건강 회복 … 가족 20명과 격려하며 즐거운 삶

청주시 청원구 오근장역 부근 공군 17전투비행단 진입로는 요즘 단풍이 짓게 물든 메타세콰이아 가로수로 장관을 이룬다. 잔잔한 호반위로 울긋불긋 단풍 수채화를 드리우는 청남대의 가을 풍광은 가히 압도적이다.
대통령 별장이었던 청남대의 조경과 공군부대 메타세콰이아 가로수는 30여년전 충북을 대표했던 향토 조경기업 ㈜한림농원의 작품이다.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탔던 한림농원은 외환위기인 IMF 때 부도로 쓰러진 뒤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충청타임즈 창간 15주년 기획 `어떻게 지내십니까?'는 한림농원 대표이자 전 청주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했던 한현구 전 충북도의회 의장(81)을 모셨다.
“이젠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을 사람을 뭣 하러 찾아오셨나?”
지난 27일 문중 종친회 참석차 청주를 찾았던 한 회장을 청주시 서원구 산남동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백발의 한 회장은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냐는 질문에 여유롭고 인자한 미소로 지난 일을 꿰어 나갔다.

- 청주를 떠난 지 20년이 훨씬 넘게 지난 것 같습니다.
△IMF 때인 1997년이니 23년이네요. 한림농원 부도를 내고 쫓기듯 서울로 갔지요. 사실 그동안 청주는 거의 내려오지 않았어요. 어쩌다 와도 아무도 몰래 조용히 다녀갔어요. 사업을 부도내면서 심적 고통이 아주 컸고 피해를 준 지인도 있다 보니 고향을 멀리하게 됩디다. 아내는 단 한 번도 안 내려왔어요.

한림농원 부도 얘기 대목에 한 회장은 23년 전 기억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건설업과 조경업을 하면서 당시 중견기업인 국제건설과 맞보증을 섰는데 국제가 부도나면서 밀려드는 채무를 감당할 수 없었지요. 그때 한림농원을 담보로 당시 충북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려 했는데 땅 감정평가를 평당 2만원밖에 안쳐주는 거예요. 당시 최소 7만원은 됐는데 … 여기에는 지역의 오랜 학맥 갈등이 작용했어요. 청주상공회의소 회장 선거와 관련해 내게 감정을 품게 된 충북은행 내 특정고교 인맥들이 나를 공격한 거죠. 결국 한푼도 대출을 받지 못하고 한림농원을 날렸죠. 25만평, 당시 시가로 400억~500억원 가치의 농원을 100억원대 부도에 빚잔치를 한 거죠. 참 원망스러웠습니다. 지금도 충북은행 얘기를 들으면 소름이 돋고 치가 떨릴 만큼 트라우마입니다.”

- 그 뒤 사업을 포기하셨나요?
△조경일은 접고 서울로 올라와 하천 정비사업에 눈을 돌렸지요. 지금 서울 시민들이 많이 찾는 양재천 하천정비공사를 내가 했지요. 당시 우연한 기회에 독일 친환경하천정비 전문가와 인연을 맺어 국내 최초로 친환경하천사업을 도입해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7~8년쯤 이 사업에 몰두하다 집중호우로 광화문이 물에 잠기는 것을 보고 도심 저류조 건설 사업에 다시 손을 대 재미를 보았습니다. 청주 내덕동 저류조 공사도 내가 한 겁니다. 그러나 8년 전쯤 경쟁업체가 늘어나 사업을 모두 접었습니다.

한 회장은 6년 전 쯤 건강상 큰일을 당했다. 서울 일원동 대모산을 자주 올랐는데 하산길에 풀에 걸려 1미터쯤 추락하면서 척추에 금이 가는 척추 골절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그 뒤 3년 가량을 꼼짝없이 누워서 보냈다.
그때엔 “걷기만 해 달라. 걷기만 해도 축복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한 회장은 의사의 수술 권유를 뿌리치고 3년을 버틴 끝에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했다고 전했다.

- 예전의 검고 숱 많았던 머리가 백발이 된 것을 빼곤 강건해 보이십니다.
△요즘 나를 보는 사람들은 웃음도 많고 표정이 젊었을 때보다 훨씬 편안해 졌다고 합니다. 사실 부도 후 지금까지 마음 내려놓고 편해지는데 시간이 적잖이 걸렸어요. 혼자 대모산에 올라 돗자리 펴놓고 온종일 하늘만 쳐다보며 마음을 추슬렀지요. 그러다 보니 `내가 그동안 아무것도 아닌 것을 움켜쥐었구나. 돈은 왜 벌려 했나? 대단한 기업가가 된다고 열정적으로 살았는데 그게 다 소용없고 부질 없는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금은 분노하지 말자. 나와 의견이 다르다고 틀렸다 하지 말자.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아마 내가 의욕이 앞섰던 젊은 시절보다 지금이 더 편해 보이는 이유가 아닌가 합니다.
사업실패의 아픔을 씻은 듯한 표정에 청주로의 귀향에 대한 의사가 있는지를 물었다.
한 회장은 한순간 고민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 청주에 지인들도 많고 후배들도 많을 텐데 앞으로 환향할 생각은 있습니까?
△전혀 생각이 없습니다. 더구나 아내는 펄쩍 뜁니다. 솔직히 부도 후 상경한 뒤 고향에 대한 미움, 사람들에 대한 미움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보다는 그 당시 우리로 인해 피해본 지인들 볼 면목이 없다는 게 더 큰 부담입니다. 그리고 이젠 삶의 터전이 서울이 됐고요. 금의환향도 아니고….

이말 끝에 한 회장은 부도 직후 겪었던 일화를 꺼냈다.
“부도 후 어느 날 남주동해장국집 한 귀퉁이에서 점심을 먹고 계산을 하려는데 누군가 계산을 하고 갔다는 거예요. 순간 몸에 힘이 빠지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그래도 지인들에게 늘 베풀며 살았다고 자부해 왔는데 이제 도움을 받는 신세에 대한 처량함이랄까. 동정의 처지가 된 자신에 대한 한스러움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순간 팔순을 넘겨 눈물이 말랐을 것 같던 한 회장의 노안에서는 어린아이처럼 주체하지 못할 눈물이 흘렀다.
그만큼 그때의 아픔이 컸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 회장님 가족사를 듣고 싶습니다.
△아내는 3살 어린 78살인데 청주여고를 나온 수재였지요. 김신조가 넘어오던 날 결혼을 해서 평생 나를 내조했지요. 무릎이 시원찮은거 빼고는 건강하고 여전히 살림 잘합니다. 2남 3녀 중 아들 둘은 중견기업 임원, 자영업을 하고 있고 딸 셋은 회사 대표, 대학교수, 임대업을 하는 사위에게 시집가 잘살고 있습니다. 손주까지 합치면 우리 가족이 꼭 스무명입니다. 내가 사업이 실패해 유산 한 푼 남겨주지 못해 늘 미안한데. 큰딸과 사위가 형제들에게 많이 베풉니다. 한때 나 때문에 자식들이 서먹해 한 적도 있는데 큰 딸 덕에 지금은 서로 위해주고 격려해주고 정말 아주 화목합니다.

지금은 청주 한씨 청성군파 9만명 종친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는 한 회장은 5남매와 손주까지 스무명 가족이 화목하게 지내는 요즘이 그리 행복할 수 없다고 환하게 웃었다.
“내게 이렇게 행복한 날이 오다니… 행복은 역시 돈이 아니에요.”


/오영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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