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 금생, 내생
전생, 금생, 내생
  •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 승인 2020.10.29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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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論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금생 외에도 태어나기 이전의 전생과, 죽은 이후의 내생이 있다는 것이 불교의 삼세설(三世說)이다. 전생에 자신이 저지른 행동 즉, 업(業)에 따라 다음 생인 내생에 어떤 모습으로 어느 곳에 태어날지가 결정되는데, 금생에 지은 업에 따라 내생에 천상, 인간, 아수라, 지옥, 아귀, 축생 등 여섯 세계 중에 한 곳에서 태어나게 된다는 윤회설도 있다.

삼세설과 윤회설은 뭔가 신비주의적 요소가 강한 듯 보이지만, 잘 음미해보면 과거에 자신의 행동이 원인이 되어 지금이라는 결과를 낳고, 지금의 행동이 미래의 결과를 낳는다는 인과(因果)법이고 질량보존의 법칙에 다름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은행에 저축을 하면, 점점 돈이 쌓여서, 언젠가 필요할 때 목돈으로 찾아 쓸 수 있다. 은행에 이런저런 담보로 대출을 받아쓰면, 그 빚이 점점 불어나 언젠가 큰돈을 갚아야 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이처럼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삶의 각각 별개가 아니라, 서로 원인과 결과가 된다고 보는 것을 조금 더 거창하게 확대 표현해서 전생 금생 내생이라고 일컬었을 뿐, 막연한 신비주의를 지향한 것이 아님이 너무나 분명하다.

어제 친구와 싸우고 온전히 화해하지 못한 채 오늘 다시 만난다면 두 사람의 사이는 서먹서먹할 수밖에 없다. 오늘 분주하고 힘겨운 하루를 보낸다면, 내일은 피로가 몰려 올 수밖에 없는 것이 전생 금생 내생의 삼세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교의 잡아함경은 전생 금생 내생의 삼세설을 다음과 같은 게송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欲知前生事(욕지전생사) 今生受者是(금생수자시) 欲知生事(욕지내생사) 今生作者是(금생작자시)” 즉, “전생의 일을 알고자 하는가? 금생에 받고 있는 이것이다. 내생의 일을 알고자 하는가? 금생에 짓고 있는 이것이다”라는 의미로, 과거인 전생과 현재인 금생과 미래인 내생이 각각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인과법을 강조한 것을 알 수 있다.

공자님께서는 “欲知未來(욕지미래) 先察已然(선찰이연)” 즉, 미래를 알고자 하면 먼저 이미 그러하였음을 살피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공자님은 또 “明鏡所以察形(명경소이찰형) 往者所以知今(왕자소이지금)” 즉, 밝은 거울이 얼굴 모습을 알 수 있게 해 주듯이, 지나간 과거의 행동으로 인해 현재의 모습이 결정된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는 마태복음 5장의 말씀도 모든 것이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는 인과법(因果法)과 함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오늘 피곤에 지쳐 있다면 어제 무리해서 과로했음을 알겠고, 오늘 충분한 휴식을 통해 심신의 안정을 취한다면 내일의 삶이 편안하리란 것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제 불필요한 낭비를 일삼았다면, 오늘 주머니 사정이 말라붙으면서, 꼭 필요한 물건을 사는데도 망설이게 되고, 오늘 근검절약하는 검소한 삶을 살면 내일이 풍요로워 질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하다. 이처럼 모든 것이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인과법에 따라, 과거 현재 미래가 한 꾸러미로 이어지면서 쉼 없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과거는 이미 흘러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지금 이 순간만이 온전히 실존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하면서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가? 지금 이 순간 나는 어느 곳으로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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