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바람
가을 바람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20.10.26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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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계절의 추이는 인간의 기대를 뛰어넘는다. 사람의 감각은 익숙해진 대로 반응하게 마련이라서, 계절이 설마 하루 사이에 바뀔까 의심한다. 그러나 계절은 어느새 인간의 무딘 감각을 비웃으며 잽싸게 무대복을 갈아입곤 한다.

계절은 곧 바람이다. 가을이 된다는 것은 가을 바람이 삼라만상에 불어 드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조선(朝鮮)의 시인 서거정(徐居正)은 가을 바람이 펼치는 변화 공연을 만끽한 관객이었다.


가을 바람(秋風)

茅齋連竹逕(모재련죽경) 띠 집은 대나무 길에 이어졌는데
秋日艶晴暉(추일염청휘) 가을 해는 요염하게 맑은 햇살 비추네
果熟擎枝重(과숙경지중) 열매는 익어 높은 가지에 무겁게 달려 있고
瓜寒著蔓稀(과한저만희) 오이는 차갑게 성긴 덩굴에 매달려 있네
遊蜂飛不定(유봉비부정) 오가는 벌은 쉴 새 없이 날고
閑鴨睡相依(한압수상의) 일 없는 오리는 자면서 서로 기대네
頗識心身靜(파식심신정) 부쩍 몸과 마음이 고요한 걸 알겠거니
棲遲願不違(서지원불위) 한가히 지내며 어긋나지 않기를 바라노라

시인의 거처는 띠 풀을 얽어 만든 소박한 집이다. 그리고 집 옆에 대나무 숲이 있고 그 안으로 오솔길이 나 있다. 모옥(茅屋)과 죽경(竹逕)은 세속을 떠나 은거하는 은자(隱者)의 거처를 대변하는 말들이다. 시인 자신이 은자임을 넌지시 말한 것이다.

시인의 집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신 곱게 차려입은 농염한 여인 같은 가을 햇살이 시인의 벗이 되어 준다. 시인이 하는 일은 세속의 번거로운 일과는 거리가 멀다. 과수를 키우고 오이 농사를 짓는 것이 시인이 하는 일의 전부이다. 가을이라 과일은 다 자라 그 무게를 매달고 있는 가지가 힘겹게 감당하고 있다. 오이는 가을 바람에 듬성듬성해진 넝쿨에 차가운 모습으로 매달려 있었다. 벌은 바쁘게 여기저기를 오가는데, 한가로운 오리는 서로 기대어 잠을 자고 있다.

모두가 가을날 은자의 거처 모습들이다. 번거로운 인사는 찾아볼 수 없고, 계절에 순응하여 변화한 자연의 모습만이 시인을 에워싸고 있다. 이렇게 살다 보니 시인은 부쩍 몸과 마음이 안정됨을 느끼고는 남은 여생을 인사에 얽히지 않고 자연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고자 다짐한다.

가을은 조락의 계절이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시들고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슬픔이거나 불행은 아니다.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모습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평안해진다. 이런 의미에서 가을 단풍은 놀이의 대상이 아니라 사람들 삶의 지표이다.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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