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 동안
나흘 동안
  • 정명숙 수필가
  • 승인 2020.10.26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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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수필가
정명숙 수필가

 

열두 가구가 사는 산속마을에서 우리 집은 지대가 높은 곳에 있다. 집을 둘러싸고 있는 산은 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어 개발이 쉽지 않은 곳이다. 마당 끝으로 작은 계곡물이 흐르고 옆에는 지하수를 가두는 물탱크가 키 큰 참나무에 기대있다.

마을이 생긴 지 십여 년이 훌쩍 넘었어도 부족함 없이 쓰던 지하수가 일 년 전부터 가끔 멈추기를 반복했다. 물 부족이라고 했다. 일 년에 두 번씩 하는 수질검사도 늘 합격이었고 물맛이 좋아 생수로 먹는 지하수인데 포기할 수 없어 용량이 큰 물탱크로 교체하기로 했다. 공사기간이 나흘 걸릴 것이라고 각자 쓸 만큼 미리 받아놓으라는 연락이 왔다.

공사 전날 밤 욕조 가득 물을 채우고 양치할 물은 뚜껑 있는 통에 받았다. 주방바닥과 싱크대 위까지 빼곡하게 놓여 있는 여섯 개의 커다란 통속의 물은 맑고 투명했다.

아침식사를 준비하면서 통하나가 비워졌다. 설거지를 하자 또 하나의 통이 반으로 줄었다. 샤워도 하지 않고 세수만 했는데 욕조의 물도 눈에 띄게 줄었다. 점심은 아주 간단하게 해결했으나 저녁을 하면서 또 하나의 통이 사라졌다. 평소에 물을 쓰던 습관이 남아서다. 조심스레 비켜 다니던 주방에 여백이 생기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둘째 날은 쌀과 야채 씻은 물을 따로 모아 화분에 주었다. 세수한 물은 변기 물로 사용하고 빨래는 엄두도 내지 못하니 청소기만 돌리고 걸레질도 하지 못한다. 최소의 물소비를 해도 줄어드는 물로 예민해지기 시작한다. 물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나흘은 유한한 시간이다. 공사가 끝나면 예전처럼 편안해질 텐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주말이지만 아이들도 오지 못하게 하고 누군가 올까 봐 몹시 신경이 쓰였다. 흔하게 쓰던 물 때문에 몸이 달기는 처음이다. 혹여 물 부족으로 날마다 제한 급수를 받게 되는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될까.

사흘이 되었다. 주방에는 한 통의 물만 남았다. 설거지 그릇은 쌓여가고 욕조도 바닥 가까이 줄어 양치질만 하고 세수도 하지 않았다. 날마다 하던 반신욕도 못하니 온몸이 근질거린다. 몰골이 꾀죄죄하다. 그것도 아직은 참을 만하다. 먹는 물이야 사오면 해결되겠지만 생리현상을 책임지는 변기가 문제다. 마당 끝 계곡물을 떠와야 할까. 아니면 이웃 동네 가서 얻어 와야 할까. 재래식 화장실이 간절하게 그립다.

지난여름, 많은 사람들의 집과 전답을 쓸어가고 소중한 생명을 앗아갔던 성난 물길은 다 어디로 흘러갔을까. 태풍으로 집중호우가 내리는 날, 충주에 사시는 선배 문우께서는 뒷산에서 밀려 내려오는 엄청난 토사를 목격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일을 당했다. 다행히 집안은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마당에 가득 찼던 진흙을 치우느라 갖은 고생을 하더니 결국 아끼고 가꾸던 집을 팔고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넘쳐도, 모자라도 물의 위력 앞에서 사람의 힘은 무력하다.

공사는 나흘 만에 끝났다. 물은 다음 날 아침에야 쓸 수 있었다. 어디서나 만날 수 있어 흔한 거라 여겼던 물인데 멀리 떠나 만날 수 없었던 그리운 이를 만난 것처럼 반갑고 귀하다. 쌓였던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목욕을 했다. 내게 나흘은 멈춰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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